박상진(철학박사, 동국대학교 한국음악과 명예교수)
얼마 전 자동차 전용 도로를 운전하며 가는데 "길어깨 없음”이라는 표지판을 보고 어리둥절했다. ‘길어깨’?, 약 20여 년 전에 노견(路肩)을 우리말로 바로 쓴다고 ‘길어깨’로 잠깐 사용하다가 ‘갓길’로 개정하여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느닷없이 ‘길어깨’라는 용어가 등장한 것이다. 이미 도로교통법이 1991년에 개정돼서 시행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아마도 도로 공사에서 설치한 표지판일 텐데 아직도 20여 년 전 용어를 사용하다니, 오래전부터 사용하던 것을 감각 없이 그대로 사용하는 것인지 의아할 따름이다.
길어깨(노견)라는 말은 영어의 ‘Road Shoulder’를 일본에서 영문자 그대로 ‘노견’으로 직역한 일본말을 다시 우리말로 그대로 바꾼 것이다. 만약 한자 단어 ‘노견’을 그대로 한글로 표기하여 계속 사용했다면 아마도 ‘길거리를 방황하는 개’의 뜻으로 읽혔을 것이다. 그래서 노견을 노변(路邊)의 개념으로써 갓길이라고 개정한 것이다. 갓길은 큰 도로 옆의 가장자리 길을 말하는 것으로서 우리나라 토착어이다.(이어령 글 참조)
한자나 영어 같은 외래어들은 구두 신고 발을 긁는 것과 같다. 상처 위에 생긴 딱정이가 떨어지면 여린 새살이 난다. 한자와 외래어들은 한국인의 마음에 난 상처를 덮은 딱지 같은 것이다. 그 딱지가 떨어지면 새로 나온 새살의 감촉과 신경줄 같은 토착어가 살아난다. 이렇게 같은 뜻의 센서티브한 토속 문화가 있다. 좋은 말을 자꾸 쓰면 굳은살이 박힌다. 일상어는 발뒤꿈치처럼 굳은살이 박힌 언어이다.
창조력의 씨앗은 당연히 지극히 이 토착어 또는 토속문화 속에 녹아들어 있다. 그것을 우리는 풍토(風土)라고 부르는데, 우리가 발을 딛고 사는 토(土) 즉 ‘흙’은 고정불변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바람(풍)’은 한순간도 머물지 않는 변화의 상징이다. 일본인이 아무리 약탈을 해가도 흙은 약탈할 수 없었다. 땅속에는 우리 선조들의 혼이 묻혀 있다. 그러나 바람은 끊임없이 변한다. 동쪽에서도 불고 서쪽에서도 불어온다. 서양에서 그리고 일본과 중국에서도 불어 들어온다. 결국 흙 속에 저 바람 속에 우리의 운명이 있고, 과거와 오늘이 있고 또한, 미래가 있는 것이다.
토착어를 우리는 보통 모국어라고 부른다, 그러나 토착어는 모국어보다도 더 원천적인 언어라고 할 수 있다. 이어령 선생에 의하면, "토착어란 세 살 때 어머니의 품에서 옹알이를 할 때부터 몸에 익힌 모국어이다. 내 인생의 첫 책은 어머니의 모습이고, 어머니의 말, 어머니가 읽어주셨던 그 많은 모음과 자음에서 상상력을 길렀다”라고 말한다. 한마디로 모국어로 생각하는 것이 왜 창조력과 영감의 원천인지를 설명하는 대목이다.
한국의 미(美)를 말할 때 ‘여백(餘白)의 미’라고 한다. 여백의 미란, 종이 전체에서 그림이나 글씨 따위의 내용이 없이 비어 있는 부분을 말한다. 한국화 중 ‘산수화, ’풍속화‘ 등에서 주로 나타나 있다. 한국음악 중 국악도 ’여백의 미‘를 표현한 예술이라고 할 수 있는데, 서양음악은 화성 음악으로써 음악을 꽉 채운 듯이 느껴지지만, 국악은 선율음악으로써 서양음악에 비교해서 웅장함이 덜 느껴지면서 서양음악에 비해서 단출함도 느껴지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 여백 속에는 무엇이 있는지는 보고 느끼는 사람의 상상에 맡기는 거다. 그 여백 안에 무엇을 넣든 그건 각자의 자유다. 그 여백은 상상하는 이를 끌어들이는 힘으로 작용한다. 정확하게 여백이 없이는 상상하는 이를 끌어들이는 힘을 갖지 못한다. 그 여백은 한국 음식도 그렇다. 한국 음식 하나하나는 완성품이 아니다. 밥은 싱겁고 반찬은 짜다. 싱거운 밥이 맵고 짠 김치와 입속에서 어우러질 때 진정한 맛이 난다. 먹는 사람이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 한국 음식이다.
‘흙’은 고정불변의 상징이라면, ‘바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