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진(철학박사, 동국대학교 한국음악과 명예교수)
엔카의 유래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지난 회에 발행된 ‘박상진의 한류 이야기4’에서 오류 등 수정과 보완할 사항이 발생하여 잠시 언급하고자 한다.
우리에게 많이 친숙한 가수 김정구의 친형인 김용환의 이름 중 ‘환’자가 편집과정에서 탈자가 발생하였다. 물론 편집자의 발 빠른 대응으로 발견 즉시 교정되었다. 그리고 ‘황성옛터’ 악보 중 한국콘텐츠진흥원 출처의 악보를 인용했는데, 그 악보 자체의 오류로 인한 잘못된 정보가 독자들께 전달되었다. 물론 편집자의 잽싼 대응으로 틀린 작사가의 이름이 ‘황정’에서 ‘왕평’으로 수정되었다. 그럼에도 오류로 인한 혼란을 끼친 것 같아서 사죄의 말씀을 드린다.
그러면서 ‘황성옛터’에 대한 곡 설명을 해드리는 것이 도리일 것 같아 잠깐 언급하고자 한다.‘황성옛터’의 본래 제목은 ‘황성(荒城)의 적(跡)이다. 이 곡명은 1932년도 최초의 취입 레코드 라벨에 인쇄되었던 곡명이다(정문교 신나라레코드 사장 제보). 왕평(王平) 작사, 전수린 작곡, 이애리수 노래이다.
이 ‘황성옛터’는 1928년도에 전수린이 소속되어 있던 순회극단 연극사(硏劇舍)가 개성공연을 하고 있을 때 작곡된 노래로서 폐허가 된 고려의 옛 궁터인 황성(고려 현종 때 지금의 평양에 축조한 성) 만월대를 찾아 받은 쓸쓸한 감회를 그린 노래이다. 이 노래는 그 해 가을 단성사에서 가수 이애리수가 막간무대에서 불렀는데, 노래 부를 때마다 관중들도 따라 불러 크게 히트하면서 삽시간에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조선총독부는 유행을 방지하기 위해 금지시켰으나 계속 불려졌다고 한다(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조). 가수 이애리수는 이 노래를 통해서 배우에서 가수로 전환하는 일대 운명의 전환기를 맞게 된다.
고려의 옛 궁터인 황성 만월대의 달 밝은 밤, 역사의 무상함을 느껴 즉흥적으로 작곡한 황성옛터는 느린 3/4박자의 리듬에 단음계로 만들어진 곡이다. 국악의 중모리 장단에 선율을 얹어 작곡한 것으로 보인다. 전수린의 즉흥성에 중모리장단이 자연스럽게 표출된 것일 것이다.
그러면 엔카의 유래에 대해서 알아보자.
일본에서는, 일본 대중가요를 지칭하는 소위 엔카라는 장르의 이름은 언제부터 사용하고 있었을까? 일본 가요음악의 태동기인 19세기 후반 무렵(이 당시 일본에서는 속악(俗樂)이라고 불렀음)부터 1920년대 후반까지도 엔카라는 용어 자체가 없었다. 그리고 1800년대 후반부터 서양문물이 유입되면서 간접적으로 서양음악을 접할 수 있게 되었다. 일본 가요계의 초창기라고 할 수 있는 1910년 무렵에는 유성기라고 불리는 레코드가 수입되었지만, 열악한 환경 속에서 레코드가 일반인들에게 잘 보급되지 않아 일반 국민들은 서양 노래나 일본의 가요들을 쉽게 들을 수 있는 기회를 갖지 못했다.
그래서 이 당시에는 원곡의 음이나 리듬은 그대로 두고 가사만을 다른 언어나 시대에 맞게 바꾸어 고친 번안곡을 부르는 게 유행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음악들을 악보로 인쇄해서 보급하는 수준은 아직 갖춰져 있지 않아 노래가사만 수록된 노래집이 등장하게 된다. 이렇게 서양의 번안곡과 함께 새로이 작곡한 창작곡의 노래 가사만 인쇄해 거리에 돌아다니면서 노래집을 팔던 사람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처음에는 샤미센을 연주하다가 나중에 서양음악이 유입되면서 바이올린을 켜며 노래 가사집을 팔던 거리의 악사들이었다.
일본에서는 그동안 이들을 엔카시(艶歌師)라고 불러 왔던 것이다. 일본 가요계는 훗날 ‘엔카의 대부’라고 불리는 고가 마사오가 등장할 무렵, 이름 붙이기를 좋아하는 일본 사람들은 유행가요에 장르 이름을 붙일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 이렇게 일본식의 이름을 찾다가 엔카시의 엔카(艶歌)에서 착안해 이와 발음이 똑같은 한자말만 바꿔 엔카(演歌)라는 말로 일본 유행가의 장르 이름을 탄생시키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