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명 : 이희명 초대전 (제4회 ETRO 미술대상 은상 수상 기념전)
<이희명 작업노트>
영원을 꿈꿔왔던 나를 비웃듯 현실은 지나치게 순간적이며 다변적이었다.
쌓아 올린 유리잔들처럼 조그만 힘에도 나약하게 부서져 버릴 듯이.
어긋난 관계로 인한 인식의 틈이 생긴 후, 가족이나
친구, 훗날 나의 새로운 인연이 될 사람들도 ‘나의 것’이라고 단언할 수 없었다. 사람에 대해 기대했던 마음은, 상처받지 않기 위해 모든 것을 가린
채 그렇게 홀로 침잠되었다. 밀려드는 불안정은 소유욕만 부추겼고, 그로
인한 공허감은 더욱 거대해져 갔다. 화해와 공유, 희망 같은
이상화 없는 현실 안에 서있었다.
이러한 관계의 틈 사이로 인한 소통 불가, 그
외로움에 대한 시선이 내 작업의 출발점이다. 세상을 바라보았던 기존의 안정된 시선에서 벗어나 그것을
재해석 하고자 노력했다. 현실의 냉담함으로 비참하게 가려진 나약한 마음들을 표현하며, 평행선처럼 접점이 사라진 관계에 대해 가졌던 혼란과 착각을 작업으로 대변했다.
작업에서 보이는 불균형한 화면구성, 갈라진 신체, 왜곡된
얼굴의 이미지, 경계를 알 수 없는 무의식적 터치 등이 이것을 말해준다.
자유로울 때는 사방이 문이었지만, 이제
탈출구는 하나이며, 보이는 구멍마저 작아졌다.
과거에 억눌리고 미래에 짓밟히는 가혹한 현실이지만, 오히려 이러한 현실을 통해 가장 인간다운 본성이 발현되어 꿈틀거린다.
인간이라면 느낄 수 있는 강력한 울림, 그
생생한 내면의 진동을 위해.
<전희경 작업노트>
언제부터인지, 보이지 않지만 알고 있고 느끼고 있는 공간을 시각적으로 그리는 것에 몰두하고 있다.
아마 상상의 공간이라고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우리가 상상한다는 것은 현실에 존재하지 못하는 개인의 이상을 머릿속에서 구현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나는 머릿속에 꾸려진 상상의 공간을 색들과 붓질과 뉘앙스로 쏟아낸다. 그것이 무엇을 딱히 상징한다거나, 의미하지 않는다. 하지만, 누구나 알만한 그런 뉘앙스의 느낌을 가고 있다.
공간, 공간을 만들고 그린다. 구체적 형상을 그려 넣지는 않지만, 심해와 같은, 협곡과 같은 모티브가 녹아있다.
나는 상상의 그 공간으로 때론 도피하거나, 목적지로 삼거나, 위안하거나 한다. 그 흔한 안식처가 될 수 있지만, 존재하지 않는 피안일 뿐이다.
꿈꾸는 모든 이상향을 얻었을 때, 더 이상의 꿈이 아니다. 우리는 그 꿈을 찾아 살아간다고 하지만, 애초에 만족스러운 꿈은 없다. 단지 나의 미래와 현재의 간극만이 나를 지탱해줄 뿐 이다.
가끔은 시공간을 초월해 수많은 간극의 공간을 내려다 본다.
그것을 나는 핀셋으로 집어서 화면에 펼쳐놓는다. 누구의, 어떤 것들의 사이에 존재했을지 모르는 공간. 삶과 미래, 그 팽팽한 관계 사이에 있어서 분절되거나 왜곡된 제3의 공간일 뿐 이다.
그 간극의 공간이 팽팽해 개인의 감당하기 힘들어지면 우리는 허무하거나 공허해지는 감정으로 분출되기도 한다.
대립선상에 있는 A와 B, 그 간극의 공간을 회화의 언어로 풀어낸다. 나는 그 간극의 공간에 부유하는 순간을 몸으로 느낀다. 머릿속에서 스토리를 상상하고 무중력상태와도 같은 순간을 느낀다. 영원히 그 공간에서 빠져 나올 수 없음을 안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물, 땅으로부터 솟아 올라가는 자연.
오직 물 만이 땅에서 하늘로 올라가면 이상하게 생각되어진다. 모든 자연은 아래서 위로 가려는 욕망인데 말이다.
펼쳐진 화면 안에서 나는 나의 붓질, 물감과 함께한다. 가끔은 나의 손에서 느껴지는 붓 한 자락의 모든 것으로부터 해방되고 싶기도 하지만, 다시 눈을 떴을 때, 펼쳐진 공간이 꼭 나의 인생 같기도 해서 그림을 계속 하고 있는 것 같다.
어딘가 낀 삶. 이쪽과 저쪽에서 오도가도 못한 채, 부유하고 있는 삶의 모습이 우리의
자화상 이지 않을 까. 미래로 나아간다는 것은 부푼 풍선이 터지는 것.
그것이 아니라, 더 큰 풍선을 선물로 받는 것. 그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