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을 흥으로 극복한 전수린
박상진(철학박사, 동국대학교 한국음악과 명예교수)
한국 ‘트로트의 아버지’라고 불러야 마땅한 천재성을 가진 전수린은 어릴 때부터 동요를 작곡하기도 하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한국 음악의 선구자인 홍난파와 함께 활동하면서 민족가요인 <황성옛터>를 위시해서 정답고 잊을 수 없는 대중명곡을 수 백곡 작곡하였다. 또한, 전수린은 대중음악의 초창기 아무것도 없는 한국 가요계의 황량한 벌판을 개척하며 대중음악의 집을 지었고, 일본 등에 유학을 가지 않고도 일제강점기 불모지였던 한국 대중가요의 개척자로서 고가 마사오의 엔카 음악에 영향을 미친 천재적 작곡가이다.
천재적 예술가란 하느님이 자신의 실수로 만들어진 아이를 그냥 세상에 내보냈다가는 제대로 살아갈 수 없을 것임을 알고 급하게 특별한 재능을 하나씩 준 존재들이라고 한다. 눈곱 하나 떼어다 붙여서 피카소 같은 천재 미술가가 되게 하고, 귀지 하나 넣어주어 베토벤 같은 천재 음악가가 태어나게 한 것이라고 한다. 실재로 문화 예술의 영역에는 이와 같은 아이들이 존재한다. 모차르트처럼 절대음감을 가진 네 살짜리 아이들이 있는 것이다. 이런 아이들에게 일반 교육을 시키면 인생의 낙오자가 될 수밖에 없다. 그리스 비극 <필록테테스 Philoctetes>에 나오는 ‘활과 상처’의 예술 이론을 바탕으로 한 이야기이다.(이어령 글 참조)
필록테테스 장군은 트로이 전쟁에 참전 중 독사에게 물리게 되는데, 이 때 병을 앓고 발작을 일으켜 무인도에 버려진다. 그러나 그가 잃지 않은 것이 있으니, 아폴로 신에게서 받은 백발백중의 신궁(神弓)이었다. 그리스 군은 트로이 전쟁에서 이기려면 반드시 이 신궁이 필요하다는 신탁(神託)을 받고, 승리를 얻기 위해 그의 활을 몰래 훔치기 위해서 무인도에 사자(使者)를 보낸다. 사자가 필록테테스의 활을 가져 오려면 활과 함께 그의 병인 고통의 상처도 가져와야 한다. 활과 상처는 분리할 수 없는 것임을 깨달은 사자는 필록테테스와 함께 트로이 전쟁에 참가하고, 결국 전쟁을 승리로 이끈다.
니체는 인간의 발달을 3단계로 설명하는데, 그것은 낙타, 사자, 어린아이이다. 맨 처음 인간은 낙타에 비유한다. 무거운 짐을 지고 사막을 건너며 참고 견디는 인고(忍苦)의 존재, 그 다음 단계는 힘이 센 사자이다. 힘으로 주위를 지배하고 개척하는 존재, 그 다음은 어린아이이다. 어린아이는 어떤 편견이나 틀도 없는 순진무구한 존재 그 자체이다. 어린아이는 그 무엇도 될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의 상징이다. 어린아이는 누구나 태어날 때부터 천재성을 가진다. 그 자체가 무서운 힘이다. 그래서 예술가들의 무한 창조성을 종종 어린 아이의 생성의 힘과 비교하곤 한다.
예술가는 무인도에서 상처를 끌어안고 혼자 괴로워하는 존재이다.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서든 마찬가지이다. 그 괴로움의 상처를 받아주지 않고 그의 활만 탐내는 사회는 절대로 풍요로운 사회가 될 수 없다. 신궁의 파워와 함께 그 상처까지 포용하는 사회와 역사만이 승리와 행복의 영광을 얻는 문화국가를 이루는 것이다. 천재적 작곡가 전수린은 무인도 같은 절망적인 일제 강점기의 숨막히는 시대에서 민족의 상처를 끌어안고 괴로워하며 전수린 만의 창조적 대중가요의 영역을 개척한 것이다.
그런데, 전수린의 창조적 대중가요의 영역은 민족의 상처를 끌어안고 괴로워하며 슬퍼하는 한(恨)의 표현뿐만 아니라, 민족의 한을 극복하며 보듬어 안는 희망의 메시지도 강하게 담은 노래들도 많다. 이것은 마치 우리나라 전통음악의 형식을 많이 닮아 있다. 우리 전통음악은 대부분 느리게 시작해서 점점 빨라져 흥겹게 끝나는데, 이러한 스타일은 느린 슬픈 음악에서 빠르게 흥겨운 음악으로 고난의 한을 극복하는 과정을 담은 것이다. 한마디로 우리 음악은 몇 천 년 간 강대국 사이에서 견뎌온 한국인의 창조력이자 돌파력의 표현인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한의 민족이 아닌 흥(興)의 민족임을 말하는 것이다.
참고로 ‘한민족은 한의 민족’이라는 말은, 일본의 야나기 무네요시가 처음 만들어낸 말인데, 일제 강점기의 야네기 무네요시는 우리문화의 우수성을 극찬했던 사람이었지만, 우리나라의 문화말살 정책을 처음 기획했던 인물로서 식민사관을 주입하는데 앞장섰던 인물이다. 그의 식민사관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우리 스스로를 멸시하고 부정하도록 만들었고, 일본을 우러러 생각하도록 만든 것이다. 일본인 야나기 무네요시의 두 얼굴인 것이다. 현재도 일부 국민들은 이러한 식민사관을 극복하지 못하고 일본이 우리보다 우월하다는 생각을 버리지 못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아직도 대중음악의 장르에까지 일부 남아 있는 것은 안타까울 뿐이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 시대에 일본 등 해외에 유학 한 번 가지 않은 음악 영재인 전수린은 이러한 전통음악예술을 자기의 대중가요 작품에 고스란히 반영시켜 자기만의 정체성을 개척한 장본인이다. 그야말로 전수린의 천재성이 드러나는 대목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그의 두 번째 작품인 <고요한 장안>은 물론 세 번째 작품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