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진(철학박사, 동국대학교 한국음악과 명예교수)
엔카의 전설이라고 불리는 다카기 이치로는, 제이피(JP) 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일본 엔카의 원점이 되는 천재 작곡가 고가 마사오(古賀政男)는 일본 후쿠오카 출신이지만 유년 시절에 한국에서 교육을 받은 사람이었다. 그가 일본에 건너가 탄생시킨 엔카의 멜로디는 한국의 것이고, 엔카의 원조는 한국이다.”라고 말하였다. 또한 1932년 일본의 음악평론가 ‘모리(森一也)’는, 당시 ‘고가 마사오’가 조선에 살고 있었을 때 들었던 ‘전수린’의 멜로디에 영향을 받은 것 같다고 분석하고 있다.
그렇다면 전수린은 어떤 작곡가인지 좀 더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자. 이미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전수린(全壽麟, 1907~1984))의 본명은 전수남(全壽南)이다. 악극단 취성좌(聚星座)의 바이올린 주자로서 개성의 백천 지방으로 순회공연을 갔다가 비에 갇혀 있던 쓸쓸한 여인숙에서 애수 어린 <황성의 적(황성옛터)>를 작곡해 일약 민족가요의 작곡가가 된 전수린은 인삼으로 유명한 개성이 그의 고향이다. 어릴 때부터 습작으로 동요를 작곡하기도 한 전수린은 명문인 개성의 송도고등보통학교(송도고보-1952년 인천으로 이전) 재학 중 장봉손(張奉孫)에게서 바이올린의 기초를 배웠고, 호수돈 여학교의 교장인 니콜스(Nicols) 여사(루추 부인이라는 설도 있음)에게서 정식으로 바이올린과 음악이론을 사사하면서 음악가의 꿈을 키웠다.
송도고보를 졸업(15세 때 중퇴라는 설도 있음)한 후에는 완고한 부모님을 설득해서 본격적인 음악 공부를 시작한다. 1925년에 청운의 뜻을 품고 상경한 전수린은, 열아홉 살 때 <봉선화> <성불사의 밤> 등을 작곡한 한국 음악의 선구자인 홍난파 선생이 주도하는 연악회(硏樂會)에 들어가 음악을 익히면서 동요 작곡가로 활동하게 된다.
그리고 다음 해부터는 이미 가수들을 위한 편곡을 하기 시작하는데, <부활> <카츄샤> 같은 외국 가요를 편곡해서 불렀을 뿐만 아니라, 이때까지 우리나라 고유의 대중가요가 없던 시절에 당시의 순회극단인 동방예술단(東方藝術團)과 취성좌에 악사로 있으면서 독자적인 작곡을 하기 시작한다. 단발머리 소녀 박단마를 하루아침에 인기가수로 만든 <나는 열일곱 살이에요> 는 1937년에 작곡하여 1938년에 발표한 작품이다.
악극단 취성좌와 함께 순회공연을 하면서 작곡구상을 하던 전수린이 최초로 작곡한 처녀작은 이애리수가 노래한 <이국하늘>이며, 1926년경에 작곡해서 막간극의 노래로 불리다가 1932년에 일본에서 발표한 <고요한 장안>이 두 번째, 그리고 그 유명한 <황성옛터>가 세 번째 작품이다. 일제강점기에서 <황성옛터>는 공연히 시비를 당했고, 작사, 작곡이 모두 불온하다고 해서 한국 최초의 금지 가요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황성옛터>는 한국의 세레나데라고 해서 일본사람들도 곧잘 부르던 노래였다. 악극단 취성좌의 인기가수 이애리수가 이 노래를 부르면 수많은 관중들은 저도 모르게 따라 불렀으며, 삼천리 방방곡곡 우리 겨레가 있는 곳에서는 으레 애수 어린 <황성옛터>의 가락이 흘러나왔다.
<황성옛터>의 작곡으로 일약 민족가요의 작곡가가 된 전수린은, 이애리수를 인기가수로 만들었을 뿐 아니라 풋내기 열일곱 살의 소녀 가수 박단마를 <나는 열일곱 살이에요>의 단 한 곡으로 스타덤에 오르게 했으며, 또한 16세의 소녀 가수 황금심에게 <알뜰한 당신>을 부르게 해서 단 한 곡의 데뷔곡으로 황금의 신인을 만들기도 하였다.
<알뜰한 당신>을 황금심이 부르면서 히트하게 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