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진(철학박사, 동국대학교 한국음악과 명예교수)
일본은 메이지 시대(1868~1912)가 열리면서 일본 대중음악의 태동기가 시작된다. 1892년 음악 이론가 우에하라 로꾸시로가 쓴 책 ‘속악선율고’(俗樂旋律考)에 일본의 음계가 처음으로 언급된 것으로 보아, 일본의 대중가요는 19세기 후반 무렵부터 1920년대 후반까지는 일본의 전통 민속음악과 함께 속악(俗樂)이라고 부른 것으로 보인다. 이때까지는 일본의 대중가요를 지칭하는 소위 엔카라는 용어는 없었다. 일본이 서양음악을 접하게 된 것은 서양문물이 유입되면서부터다. 1910년 무렵에는 유성기 레코드가 수입되었지만 열악한 환경으로 일반인들에게 잘 보급되지 않았고, 서양 노래나 일본 가요들을 들을 기회는 쉽지 않았다.
한국은 일본과 음악적으로 교류하기 이전인 1870년경부터 교회를 중심으로 서양음악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서양음악이 유입된 시기는 일본과 비슷한 시기이거나, 우리나라가 조금 앞선 시기일 수도 있다. 1901년부터 1916년까지는 독일인 프란츠 에케르트가 우리나라로 건너와 이왕직 군악대장으로 복무하며 양악을 가르치기도 했다. 1910년경부터는 본격적인 음악학교들이 설립되어 이미 ‘조선정악전습소’ ‘이화학당’ ‘배재학당’ 등에서 서양식의 성악과 기악을 가르치고 있었다. 미국이나 유럽으로 유학을 마치고 온 이들도 있었기 때문에 창작가요를 작곡할 소양과 외국 음악에 대한 정보를 충분히 갖춘 시기라고도 볼 수 있다.
1910년경 일본은 레코드가 일반적으로 보급되지 않았고, 번안곡이나 창작곡의 노래 가사만 인쇄해 거리에서 바이올린을 켜며 노래 가사집을 팔던 거리의 악사들이 있었다. 이들은 엔카시(艶歌師)로 불렸다. 일본 가요계는 훗날 일본 유행가요에 장르 이름을 붙일 필요성을 깨닫고, 일본적인 이름을 찾다가 엔카(艶歌)에서 착안해 이와 발음이 똑같은 엔카(演歌)라는 말로 고쳐 쓰게 되었다. 이것은 모두 다 아는 사실이다. 엔카라는 용어를 사용한 시기도, 일본 엔카의 아버지라고 부르는 고가 마사오의 발표 작품 ‘술은 눈물인가 한숨인가’를 발표한 1931년경이다.
일본에서 엔카의 아버지라고 부르는 고가 마사오(古賀政男)는 누구인가? 고가 마사오를 탐색하는 것은 일본 엔카를 이해하는 데 필수 불가결이라고 생각한다.
일본 대중가요계에 큰 발자국을 남기며 엔카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고가 마사오(1904년 11월 18일~1978년 7월 25일)는 현재의 후쿠오카 현(福岡 縣) 오가와 시에서 태어나 7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그해에 어머니와 함께 경기도 인천으로 이주하여 살았다. 인천공립심상소학교를 다니다가 12살 때 서울로 이사해서 경성 남대문소학교로 전학했다. 소학교 졸업 후에는 선린상업학교에 진학했다. 선린상업학교에서 밴드 활동과 합창단을 조직하여 음악 활동에 심취하며 재능을 보였다고 한다. 17살에 선린상업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가족과 함께 오사카로 돌아가 상점에서 잠시 근무하기도 했다. 그 이듬해 1923년에는 메이지(明治) 대학을 입학하고, 1931년에 ‘술은 눈물인가 한숨인가’를 발표하면서 두각을 나타낸다. 그 후로 고가 마사오는 엔카의 대부로 불렸고, 작고할 때까지 작곡한 곡으로는 약 4,000여 곡에 이른다고 한다.
고가 마사오는 감수성이 민감한 7세부터인 유소년 시절을 한국에서 보냈다. 발달심리학에서는 7,8세부터는 두뇌 발달이 감성의 영역에서 이성의 영역으로 바뀌며, 신체와 정서의 자극에 따라서 상상력과 창의력이 키워진다고 했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이, 고가 마사오는 ‘고가 마사오 예술대관(古賀政男藝術大觀)’의 회고기에서 "큰 형의 가게에 60여 명의 조선인이 있었는데, 나는 이들이 흥얼거리는 조선 민요를 날마다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