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오래된 정원을 가꾸어 온 이들은 많았다. 순수 국악이론 또는 작곡과 연주 등의 많은 업적들은 오래된 정원의 창고에 쌓여져 거름으로 쓰여지기를 기다리고 있다. 이제는 오래된 정원의 가치를 발굴하고 새 생명이 드러나도록 거름을 주며 새로운 창조의 곡괭이질을 해야 할 때이다.

2010년, 2,000여 명이 모인 유네스코 세계문화예술교육대회에서 개막공연이 있었다. 공연 제목은 <죽은 나무 꽃피우기>였다. 김덕수 사물놀이패의 신명 나는 공연이 시작되었다. 사물놀이 공연은 홀로그램을 이용하였다. 공연이 한창 흥이 오를 때 오래된 정원의 ‘죽은 나무’에서 꽃이 만발하고 객석으로 꽃이 떨어지는 환상적인 장면이 연출되었다. 죽은 나무에서 새 생명이 돋아나고 꽃이 피어 관객들에게 한 송이 한 송이 흩날리도록 한 것이다. 전 세계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다양성과 우리 전통의 가치를 드러내기 위한 콘셉트였다.

요즈음은 K-클래식이라는 말을 종종 듣는다. 이미 필자는 K-클래식 용어 사용에 대한 적절치 않음을 지적한 바 있다. 한 달 전 KBS교향악단 사장은 취임 인터뷰에서 "2026년 창단 70주년을 맞는 국민의 교향악단으로서 ‘K-클래식’ 음악의 우수성을 세계에 알리고 음악적 감동을 대중과 향유” 할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최근의 보도는 KBS교향악단이 정명훈과 기획연주회를 준비하고 있다고 한다. 그 내용은 말러와 브람스 곡을 선사하겠다는 것이다. 이것이 ‘K-클래식’이라는 것이다.

서양의 클래식 작품을 우리 교향악단이 연주한다고 ‘K-클래식’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미국, 영국 팝송을 우리가 부르면서 K-POP이라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K-POP은 K-컬처의 일종으로 한국 사람이 창작하고 세계인들이 부르며 공유하는 음악을 일컫는다. 따라서 ‘K-클래식’이라는 용어 사용 자체가 적절하지 못한 것이다. 진정한 ‘K-클래식’의 개념은 한국적 소재를 가지고 한국인이 작곡한 클래식 작품이어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주장이다. 그렇다면 진정한 ‘K-클래식’은 어떤 것이고 어떠해야 하는가? 간단히 살펴보겠다.

우리나라에 ‘K-클래식’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작곡가가 있다. 바로 윤이상 선생이다.

윤이상은 국내보다 해외에서 더 인정받는 작곡가라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윤이상은 1952년까지 부산고등학교에서 음악교사를 하다가 독일로 유학을 하여 베를린국립음악대학을 졸업하고 1977년부터 1987년까지 독일 베를린예술대학교 작곡과 교수를 역임하였다. 젊은 시절 남사당패나 판소리 공연에 열광했던 윤이상은 서양악기를 통해 한국 전통음악의 음향을 구현하려고 노력하였다. 이 과정에서 쇤베르크의 현대음악적 기법을 절충하면서 국악의 중심음 기법 등 독창적인 음악어법을 구사하여 세계적인 작곡가로 인정받았다.

윤이상의 작품은 국악을 소재로 한 작품이 많다. 그 대표적 곡은 뮌헨 올림픽 기념문화행사 곡으로 작곡·초연된 창작 오페라 <심청>이다. <심청>은 미국과 프랑스 등지에서도 연주되었다. 그리고 <예악>을 꼽을 수 있는데, <예악>의 특징은 한국의 종묘제례악을 소재로 했다는 점이다. <예악>은 서양악기로 연주하지만 한국의 전통악기로 연주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이 작품은 시작과 끝에 국악기 ‘박(拍)’이 연주되면서 자연스럽게 한국의 종묘제례악을 떠오르게 한다. 또 악기들의 테크닉에서 한국의 ‘농현(弄絃)’이 발견된다. 농현은 국악 악기에 주로 쓰이는 연주 기법으로서 서양악기의 비브라토와 비교된다.

그런데 윤이상 같은 특정인을 제외하고는 유감스럽게도 오래된 정원(전통음악)에 창조의 씨앗을 뿌려 새로운 한류음악을 창조하는 경우는 드문 현상으로 보여진다. 그 이유는 서양음악 작곡자들은 물론 국악 작곡자들까지도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정간보’로 되어 있기 때문인 것 같다.

그런 가운데 최근 곡괭이질을 하여 새로운 창조의 씨앗을 뿌릴 수 있도록 오래된 정원을 기름지게 가꾼 책이 출간되었다. 그것은 『세종실록 정간보·세조실록 오음약보-오선보 역보』 (박일훈 역보, 은하출판사 발행)로서 국립국악원장을 역임한 박일훈 원장이 역보(譯譜)한 책이다. 즉 국악의 전통 정간보(井間譜)를 서양의 오선보로 바꾸어 발간한 책이다.

박일훈 원장은 국립국악원 연구원, 장악과장, 악사장, 건설본부장, 국악연구실장, 국립국악원장을 역임한 국악원의 산 증인이라고 할 수 있다. 지방 국악원을 설립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국악FM방송을 개국하는데도 지대한 공을 세웠다고 한다.

필자가 서울대 음대 국악과에 입학했을 때 박일훈 원장은 복학생 3학년으로서 전통음악을 연주할 때는 늘 소금을 연주하였다. 그러나 그는 작곡 전공자였다. 그의 작품은 합창곡과 관현악곡이 다수를 이루고 있으며 12현 가야금곡, 18현 가야금곡, 대금곡 특히 <동다송(東茶頌)> 같은 다도음악(茶樂)을 작곡하면서 새로운 분야의 음악을 개척하기도 하였다.

박일훈 저, 세종실록 정간보·세종실록 오음악보-오선보역보, 은하출판사, 2024.

박일훈 원장은 『세종장헌대왕실록(세종악보)』와 『세조혜장대왕실록(세조악보)』에 관해 처음 배운 시기를 국악사양성소 중학교 1학년 때인 ‘국악기초이론’ 수업시간이었다고 회고한다. 그 후 국립국악원 재직 시절부터 틈틈이 해오던 작업을 2022년에 본격적으로 진행하여 세종악보와 세조악보 전곡을 오선보로 옮기게 되었다. 그리고 세조악보에 기초하여 세종악보와 시용향악보를 오선보로 역보하였고, 대악후보는 세종악보와 서로 다른 부분만 병기하면서 오선보로 역보하였다고 한다.

역보를 마치면서 박일훈 원장은 서울대학교의 이혜구, 장사훈 선생님 등 스승님께서 주신 숙제를 마무리했다는 감사한 마음과 함께 "위대한 작곡가 세종대왕이시여!” "영민한 지휘자 음악가 세조대왕이시여!”를 부르짖었다.

윤이상 선생이 오선보로 역보된 <세종악보>와 <세조악보>를 봤으면 어떤 작품을 썼을까 궁금해진다. 그리고 KBS교향악단이 ‘K-클래식’을 추구할 것이라면 <세종악보>, <세조악보> 또는 K-컬처를 스토리텔링 한 소재를 가지고 ‘K-클래식’ 음악을 창작하여 그야말로 ‘K-클래식’의 새로운 장르를 개척하기 바란다. 졸탄 코다이는 헝가리의 마쟈르 민요를 발굴하여 헝가리 음악을 정리하고 서양음악의 확장에도 기여하였다. 그런데 KBS교향악단은 이러한 서양 클래식을 수입해 연주하면서 ‘K-클래식’이란 이름을 붙이고 있는 것이다. 공영방송 관련 단체일수록 용어 사용에 신중해야 할 것이다.

아무쪼록 박일훈 원장의 오선보 작업 성과가 잘 가꾸어진 오래된 정원에 새로운 창조의 씨앗이 뿌려져 다양한 한류의 꽃이 만발하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

※ 외부인사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