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악계 지도자들 50여명 집결, 평택국악관현악단 창단식
3일 오후 3시 평택시 남부문화예술회관, 우리나라 국악계 전·현직 지도자급 인사 40여명이 집결했다. 평택시립국악관현악단 창단 경과보고 및 축하공연에 참가한 것이다.
한명희 前국립국악원 원장을 비롯한 전직 원장 3명, 국악과 교수 15명, 전국 전·현직 국악관현악단 단장 및 지휘자 15명, 국악계 관계자 15명이 모인 것이다. 이처럼 국악계 인사들이 대거 한 자리에 모인 것은 근래 드문 일이다.
시립국악관현악단이 십여 지역에 있으니 창단 자체가 최초이거나 획기적이어서는 아니다. 두 가지 요인인 듯하다. 하나는 평택시가 내세운 두 인물의 비중이다. 평택 출신 국악인 ‘지영희’와 작곡가 겸 지휘자 ‘박범훈’의 명성(名聲)이다. 지영희(池瑛熙, 1909~1980)는 "민족음악의 아버지”로, 박범훈(1948~ )은 "국악계 대부”로 회자 된다.
지영희는 1964년 한국국악예술학교 교사로서 피리와 해금을 지도하며 부설 국악관현악단을 발족시켰고, 이의 재편으로 1966년 서울시립국악관현악단 초대 지휘자로 활동했다. 박범훈은 지영희의 제자로서 피리를 전공하고 작곡가와 중대교수로 활동하며 1987년 최초의 민간 국악관현악단 ‘중앙국악관현악단’을 창단하였다. 전자는 우리나라 국악관현악단 역사의 시원(始原)에 위치하고, 후자는 국악관현악단을 도약시킨 인물이다.
지영희는 1973년 평택 거주 당시 국가무형유산 ‘시나위’ 종목 보유자로 지정 받아 그 예능을 공인 받았다. 박범훈은 1993년 ‘오케스트라 아시아(Orchestra ASIA)’ 창단을 주도하여 3국의 민족악기에 의한 오케스트라 운동을 주도하였다. 시작은 진행 과정에서 사라지지만, 시원은 그 결과에 의해 규정된다. 두 인물이 뿌리고 꽃피운 국악관현악은 아시아화, 나아가 세계화로 규정이 될 것이다.
평택시립국악관현악단은 평택을 ‘국악의 본산(本山)’으로 규정한다. 그 배경은 신라의 향가 ‘사뇌가’와 함께 대표적인 민속악 ‘시나위’가 1973년 평택 출신 지영희에 의해 국가무형유산으로 지정받고, 1986년 평택농악이 국가무형유산으로, 2009년 평택민요가 경기도 무형문화유산으로 지정받은 사실을 특화한 표현이다. 평택을 ‘국악의 본산’이란 규정 역시 새롭게 발족한 국악관현악단의 성공 여부로 타당성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술감독 박범훈, 상임지휘자 김재영, 단원 42명에 의한 창단식은 평택문화재단 관계자의 경과보고, 예술감독의 단원 소개를 시작으로, 정장선 시장의 인사말과 의회 의장의 축사, 한명희 전 국립국악원 원장 한명희(이미시문화서원) 좌장의 축사로 이어졌다. 시의회 의장은 "40여명 단원들의 일자리를 마련해준 시장에게 감사한다.”는 말과 박범훈 예술감독의 "평택의 소리를 세계화 하겠다”고 하여 박수를 받았다.
특히 국악계 원로 한명희 원장은 "세계적 원양어업 동원산업의 성공이 창업자가 한국 지도를 거꾸로 걸어 놓고 해양국가로의 발상으로 창의성을 발휘한 결과인 것처럼, 평택도 역사적 배경과 ‘평택항’을 기점으로 발상을 전환하여 우리 국악의 아시아화와 세계화를 이룰 수 있기를 바란다”고 했다. 그리고 박범훈 예술감독의 재기(才氣)와 추진력에 대한 개인적인 소회를 밝혀 주목을 받았다.
창단 축하 공연은 김재영 지휘로 첫 공식 연주를 하였다. 연주곡은 북한의 최성환 작곡 ‘관현악아리랑’이다. 이 작품은 재일교포 지휘재 김홍제, 재미교포 지휘자 곽승, 한국의 박범훈과 정명훈, 그리고 뉴욕 필의 로린 마젤이 지휘하여 세계적으로 알려진 작품이다. 특히 박범훈은 이 작품을 1990년 평양 법민족음악회(1990년 3월, 평양)에 참가하여 한국인 최초로 조선국립교향악단을 지휘하였다.
창단식 참석자들은 김영운 前국립국악원장, 김중현 국립민속국악원장, 박상진 前동국대교수, 이혜솔 종로아리랑보존회장, 최종실 박헌봉기념사업회 회장, 강상구 서울예대교수, 유희성 광주교대 교수, 최상화 전 중앙대교수 등으로 자리를 빛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