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진의 한류 이야기 84 <br>국악의 날 지정 - 『악학궤범』 의 시행령이 ‘국악진흥법’
지난해 7월 25일 국회를 통과해 공식 발효된 ‘국악진흥법’이 7월 26일부터 시행된다. ‘국악’이라는 공식 명칭이 사용되기 시작한 이후 70여 년 만에 국악 발전을 위한 ‘국악 진흥법’이 시행을 앞두고 있다. 여기서 ‘국악’이란, 우리 민족의 고유한 예술적 표현 활동인 전통음악, 전통무용, 전통연희 등과 이를 재해석‧재창작한 공연예술을 말한다.
이 법안은 국악산업 진흥을 위해 국가와 지자체에 역할을 부여하고 예산지원, 전문인력 양성 등을 할 수 있는 근거를 담았다. ‘국악’ 발전을 위해서 국가와 지방자치 단체의 예산을 투여할 근거를 마련한 셈이다.
500년 전 세종대왕의 애민정신의 뜻이 담긴 『악학궤범』 의 시행령인 ‘국악진흥법’이 이제야 제정된 셈이라고 볼 수 있겠다.
국악 진흥법의 시행령과 함께 지정될 ‘국악의 날’은 당연히 『악학궤범』이 펀찬된 날이어야 한다.
제2차세계대전 중 연합군이 위태할 때 영국 처칠 수상의 과감한 결단이 위대한 승리로 이끄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 때 기자가 "어떻게 그렇게 위대한 결단을 내릴 수 있느냐?”라고 묻자, 처칠은 "역사를 공부하면 된다”라고 대답하였다.
정치 및 조직의 리더가 갖춰야 할 큰 덕목은 균형적 교양이다. 그런데 그 교양의 큰 구성요소 중의 하나가 역사에 대한 안목이다. 결단을 내려야 하는 순간에 참조할 것은 역사 밖에 없다. 정부 지도자도 정치인의 한 사람으로 그 정치는 말로 표현되는 것이고, 표현되는 것으로 평가할 수밖에 없다. 그런 조직의 리더가 문화와 역사 앞에서 잘못 드러내는 사고와 표현은 마치 맹신처럼 보일 때가 있다. 그런데 그 맹신은 문화와 역사적 의지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그저 깨져야 하고 보완되어야 할 결핍일 뿐이다.
한글날은 한글 반포일을 기념하는 날이다. 1446년(세종 28년) 음력 9월 29일의 『세종실록』의 기록에 따르면 ‘훈민정음’은 음력 9월 중에 반포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를 근거로 1926년 당시 한글을 ‘가갸글’이라고 불렀으므로 음력 1926년 9월 29을 ‘가갸날’이라고 불렀다가, 주시경의 제안에 따라 1928년부터 ‘한글날’이라고 명명하였다. 그 이후 10월 29일, 그리고 10월 18일로 바꿔 지내다가 그레고리력으로 환산하여 1934년 10월 28일을 한글날로 정하였다.
그러던 중 한글이 반포된 날짜가 구체적으로 기록된 『훈민정음 해례본』이 1940년 경북 문경에서 발견되었다. 정인지가 쓴 서문 내용을 보면 9월 상순에 『훈민정음 해례본』이 완성되었다고 되어 있다. 이를 토대로 1446년 9월 상순의 마지막 날인 음력 9월 10일을 그레고리력으로 환산하면 양력 10원 9일이 된다. 그래서 오늘날까지 10월 9일을 ‘한글날’로 정하여 기념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민족문화백과사전 참조)
『악학궤범』을 보면,
"弘治六年癸丑八月上澣 資憲大夫 禮曹判書兼同知春秋館事 世子右賓客臣成俔謹序.(번역) 홍치6년 계축년(1493, 성종 24) 8월 상한(上澣)에 자헌대부 예조판서 겸 동지춘추관사 세자우빈객 신 성현은 삼가 서문을 씁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악학궤범’ 서문에 성현이 1493년 8월 상한(상순)에 서문을 작성했다는 기록이다.
이것을 1493년 8월 상순의 마지막 날인 8월 10일을 그레고리력으로 환산하면 양력으로 9월 29일이 된다.
이제 며칠 지나면 ‘국악 진흥법’이 시행된다. 그 시행령에 ‘국악의 날’도 포함될 것이다. 역사적인 날이 될 것이다. 9월 29일로 ‘국악의 날’이 지정되기를 바란다. 5월 달이든 6월 달이든 정하면 그만이겠지만, 단오날의 유래는 중국에서 비롯되었다 하고, 6월은 호국 보은의 달로서 ‘국악진흥법’을 제정한 취지에 적절하지 않다고 사료된다.
한글날이 정해진 역사의 우여곡절을 반면교사 삼아, ‘국악의 날’은 지금까지 제시한 역사적 ‧ 음악문화적 근거대로 가장 많은 사람이 공감하는 합리적인 방안으로 지정되기를 앙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