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운영 회장의 생활칼럼 시즌4] 3탄 딸의 직업 선택
나의 어린 시절 장래 희망은 의사가 되는 것이었다.
어릴 때부터 병치레가 잦아서 시골 동네에 있는 보건소의 의사 선생님에게 찾아가는 일이 다반사였다. 처음에는 어머니의 손을 잡고 의사 선생님을 보러 가면 너무 무서워서 울기도 하고, 보건소에서 도망쳐 나오기도 했다. 그런데 어느 날 의사 선생님이 주는 사탕을 받아먹고 조금씩 공포감을 떨쳐버릴 수 있었다. 고열에 시달리거나 매번 음식을 먹고 급체로 고생하면 주사를 맞기도 하였다. 의사 선생님이 주는 약을 먹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금방 고통이 사라지고 신기하게도 아무렇지 않게 벌떡 일어나 바깥마당을 뛰어다녔다. 그런 연유로 의사 선생님이 어린 나에게는 점점 더 좋은 분으로 인식되어갔다. 우리 시골집 근처에 있었던 보건소에 대한 공포감이 사라지고, 가끔씩 의사 선생님이 다른 환자들을 돌보고 있으면 숨어서 구경하기도 했다. 친구들과 '의사와 환자 놀이'도 하며 의사 선생님이 하는 행동을 따라 하기도 하였다. 고등학생 때 어릴 적의 장래 희망이었던 의학전공을 구체적으로 생각하게 되었지만, 이과 과목들이 전혀 자신이 없었던 터라 나는 의과대학 진학을 결국 포기하였다. 그래서인지 은근히 두 아이들 중 한 명이 의사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마음속에 늘 있었다. 그런데 딸아이(보람)의 행동을 관찰하면서 이담에 의사나 간호사와 같은 직업이 잘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을 실제로 하게 되었다.
보람이가 어릴 적 교회에 열심히 다닐 때였다. 또래의 아이들이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독거노인들을 보살피는 일을 정말 좋아했다. 일요일에 광둥어 예배에 참석한 나이 많고 몸이 불편한 노인들을 예배 시간이나 식사 시간에 무척 잘 챙겨드렸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들이 나와 마주칠 때면 엄지손가락을 번쩍 들어 올리면서 광둥어로 ''보람이 최고!''라고 모두들 칭찬하셨다.
몇 해 동안 꾸준히 이분들의 예배 때 피아노 반주도 맡아서 하는 것을 보고, 부모로서 무척 대견스러웠다. 딸아이가 고등학생(Sha Tin College) 시절에는 네팔 오지의 고아원에서 봉사활동을 한 후에 홍콩의 영자 일간지에 봉사 후기가 대문짝만한 박스기사로 게재되기도 했다. 딸아이가 고등학교 1학년 때에는 여름방학을 이용하여 홍콩의 Caritas Medical Center의 지체 장애아(Disabled Children) 재활시설에서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아이들을 돌보는 자원봉사를 하겠다고 하여 병원까지 데려다주고 데려오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
어느 날 내가 조금 일찍 도착하여 시간적인 여유가 있었기에 간호사 대기실에서 마주친 담당 간호사와 우연히 인사를 하게 되었다. 딸을 픽업하러 온 아빠라는 사실을 알고 난 후에 딸아이가 지체 발달장애아들을 너무 잘 보살펴 주고 있다며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해주었다. 또한 딸아이가 한달간의 봉사활동을 끝마친 날에는 현관까지 배웅나온 많은 아이들이 이별의 아쉬움에 울먹이는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지체발달장애아들과 같이 놀아주는 것만으로도 스트레스를 받는 사람들이 대부분인데 이들과 어울려서 돌봐주고 같이 이야기해주며 놀아줄 수 있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의과대학을 가겠다고 아빠와 상의했을 때 나는 부모로서 "의사는 남을 위해서 봉사해야 하는 직업이고, 희생하는 직업"이라고 상기시켜주었다. 그 후에 미국 출장 중에 모든 책방에 들러서 미국의 의과대학 진학을 위한 안내책자들을 사서 딸아이에게 갖다주기도 하였다.
미국 영주권자가 아니면 미국 의과대학 진학이 상당히 어렵다고 하여 영국의 의과대학 진학도 동시에 준비했다. 다행히 2001년도에 SAT 만점을 받은 훌륭한 성적으로 미국 시민권자도 가기 힘든 North Western University의 7년제 의과대학 영재교육 프로그램(Honors Program in Medical Education/HPME)에 무사히 합격하게 되었다.
샌프란시스코 Kaiser Hospital에서의 레지던트 시절에는 휴가차 2010년 홍콩을 방문했을 당시, 현지 교민 여성들을 대상으로 '건강 세미나' 강사로서 지역사회 어른들을 위해 한국어로 강의하는 세심한 배려심을 보여주기도 했다. 더욱이 2012년 신혼여행을 반납하고 대신에 중남미 니카라과로 의료봉사를 떠나는 딸아이의 봉사 정신에 의사로서의 길을 일생동안 걸어가도 후회하지 않을 것이란 확신이 들었다. Rhode Island의 브라운 대학병원에서 레지던트와 내과 전문의 과정을 끝낸 딸아이는, 남편의 고향인 달라스의 Methodist Hopital 등에서 근무했다. 그리고 2018년부터는 계속해서 달라스지역의 Best Doctor로 선정되어 오고 있다. 최근에는 독립하여 본인의 클리닉을 오픈하였고, Texas 공영방송에 출연하여 코로나19 펜데믹 상황에서 건강 관련 어드바이스를 해주는 역할도 잘 해내고 있다.
코비드가 시작되기 직전에 나름대로의 편안한 병원 생활을 그만두고, 본인이 돌보는 환자들에게 더욱 개인적인 진료 시간을 가질 수 있는 컨시어지 닥터(Concierge doctor)로 독립한 후에 개인 의원을 설립하여 환자를 돌보는 일을 계속하고 있다. 마침 코비드 기간이라 딸아이가 컨시어지 닥터로 독립한 후 불어닥친 비대면 진료 덕분에 많은 환자가 딸아이의 진료 프로그램에 가입하여 가족 같은 메디컬 케어를 받고 있다. 두 딸의 엄마로서, 아내로서, 그리고 환자들을 돌보는 의사로서 바쁜 나날에도 주일에 교회에서 찬양대 오르간 반주자로서도 신앙생활을 성실하게 지키는 딸아이의 믿음 생활이 항상 모든 주위 사람들에게 축복의 통로가 되길 기원한다.
평소 'Saving money'를 위한 의사가 되지 말고, 'Saving life'를 하는 의사가 되어야 한다는 아빠의 말을 충실히 지키고 있는 딸아이가 오늘도 Homeless들을 위한 무료 의료봉사를 나가면서 아빠에게 따뜻한 안부 전화를 하였다.
"I Miss You and Love You So Much!"라고 하는 딸아이가 오늘도 마냥 보고 싶다.
벌써 장성하여 마흔의 길목에 곧 들어설 두 딸아이의 엄마인 우리 딸이 나에게는 아직도 Baby임이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