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군대생활 15
30. 간호장교와 포경수술
국군 간호 사관학교출신의 간호장교들은 대부분 남자 사병들을 능숙하게 다룰 정도로 기가 세고 거친 편이었으나 수술실의 수술 보조 간호사인 (보통 수술하는 집도의 의사 곁에서 의료기기를 집어주거나 환부의 피를 닦아내어 수술을 도와주며, 간호사들 중에도 특별히 따로 트레이닝을 받은 전문 간호사들로 scrub nurse 라고 불렀던 것 같다) 정대위님은 사관학교 출신이 아닌 전주의 일반 간호대학 출신의 가냘픈 미인으로 매우 여성적이고 상냥한 분이셨다. 그때 나는 군의학교에서 부터 절에 다니던대로 일요일에는 절에 가곤했는데 정대위님도 불교 신자여서 함께 절에 다니면서 친해 졌다. 가끔 매운탕이나 다른 음식들을 만들어 우리 비오큐에 가져다 주셨고 나를 동생처럼 친절하게 대해주셔서 이상한 눈으로 보는 사람들이 있기도 하였다.
당시 우리 병원에는 혼기 꽉 찬 처녀 간호장교들이 전방 산골짜기 속 군대에 갇혀 밖으로 휴가도 잘 못 나갔고 그래서 괜찮은 남자들을 만날 기회가 적어서 그랬는지 노처녀들이 많았었다. 그러나 웬일인지 병원 안의 대부분의 미혼 남자 장교들은 간호장교들을 특별한 이유도 없이 경원하면서 가까이하지 않으려고 하였다. 그래서 간호장교들이 가끔은, 후송 온 환자들이나 기간병들 중 학벌이 괜찮고 잘 생긴 청년들을 골라 먼저 적극적으로 나서서 그들과 바람이 나는 일이 있기도 하였다. 사병과 장교의 연애는 그러나 잘못되면 상관인 장교의 책임이어서 문제가 생기면 간호장교들이 더 큰 처벌을 받았다…
그때 나는 남들이 다하는 그 수술을 아직 못해서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고교선배인 피부비뇨기과 김대위님에게 몰래 부탁 했더니 선배님은 흔쾌히 해 주셨는데 나중에 듣고보니 수술실 마취 전문 간호사인 정대위가 옆에서 거들었다고.. 지금 생각하면 별 것도 아닌데 나는 그 뒤로 정대위 얼굴 보기가 너무 부끄러워서 한참을 그녀를 피해 다녔던 것 같다. 그 당시에는 사병들이 제대 전에 너도 나도 포경수술을 받고 싶어했는데 신경외과 전문의이시던 차대위님은 호기심이 발동했는지, 자신이 포경수술을 해본 적이 한번도 없으니 한번 배워보고 싶다고 피부비뇨기과 김대위님에게 한수 가르쳐달라고 꼬드겼다. 그리고는 연습 삼아 처음으로, 곧 제대 예정이던 위생병 말년 병장 하나를 희생양으로 골라 수술을 해주었다.
그런데 정교한 솜씨를 뽐내는 피부과의사들과 달리, 그가 대충 대충 거칠게 잘라 꿰매는 바람에 거기에 헤마토마 (혈종, 피떡)가 생기고 울퉁불퉁해져서 그 사병이 울상을 지었다는데... 하루는 저녁에 내가 야간 점호를 들어가 보니 모두들 서 있는데 한 사병이 담요를 덮고 누워 있었다. 그래서 내가 점호 시간에 누가 누워있느냐고 야단을 쳤는데 다른 사병들은 킥킥거리고 그는 얼굴을 붉히며 울상이 되어 대답도 못하고 어쩔줄 몰라 하였다. 나중에 듣고 보니 그 병사가 그 병사였다. 그래도 그는 부기가 빠지면서 그 부분이 잘 아물고 울퉁불퉁 더 커져서 오히려 더 잘 되었다고 좋아했다는 후문...
안과 안대위님은 제대 후 하와이으로 이민간다는 위생병에게 그의 요청으로 군대에서 쌍꺼풀 수술도 해 주셨다. 미국에 가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쌍꺼풀이라 쌍꺼풀이 아니면 차별을 받을 수 있다는 그의 걱정을 덜어주려하신 배려였다. 내가 의료 선진국이라는 캐나다에서 겪어본 바로도, 일반적으로 환자들은 자신의 상태에 대하여 자세히 알고 싶어하고 아무리 작은 치료라 하더라도 처치에 앞서 걱정이 앞서기 마련인데, 질문을 해도 시간이 모자라 그런지는 몰라도 대부분의 많은 의사들이 치료하기 전이나 후에, 특별히 시간을 할애해서 환자들에게 그들의 상태에 대하여 친절하게 설명하여 주지 않아 답답한 적이 많았다.
그러나 안대위님은 사병이든 군인가족이든 어떤 환자든 간에 치료를 시작하기 전에 미리 그들에게 언제나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종이에 펜으로 그림을 그려가면서 치료 하려는 과정을 찬찬히 설명해주고 어떤 수술을 받으면 어떤 결과가 될 것이라고 친절히 알려주셨다. 그러면 환자들은 그분을 신뢰하고 안심하며 수술에 임하게 되는 것을 보면서 참된 의료인의 모습을 본 것 같아 나도 그 분의 그러한 점이 마음에 들었고 존경스러워졌다. 그리고 그 후부터 이것을 계기로 나도 안대위님을 본 받아 환자들에게 아무리 바빠 시간이 모자라도 가능한 한 최선을 다하여 친절하게 복약이 관한 여러가지 설명과 주의사항에 대하여 상담을 해주게 되었다. 짧다면 짧았던 나의 군대생활은 이렇게 황당하고 재미도 있었지만 배울 점도 많았던 것 같다.
31. 간호장교 정대위의 오해
제대한지 이년 쯤 지난 후 종근당 개발부에서 일할 때, 문득 옛날 군대생활도 생각나고 같이 근무했던 사람들의 소식도 궁금해져서 나는 아직 102 야전병원에 근무하고 있을 정대위에게 잘 지내냐고 무심코 간단히 안부를 적은 엽서를 한 장 보냈다. (간호장교들은 보통 한 병원에서 4-5년씩 근무하였던걸로 기억된다). 그 엽서는 내가 누군가로부터 선물로 받았던 것으로 김현승님의 시가 한 편 인쇄되어 있는 그림엽서였다.
그런데 며칠 후, 갑자기 회사로 내게 전보가 한통 배달되었는데 '지금 상경 xx' 이라고 적혀있는 것이 아닌가! 나는 아차 내가 무슨 실수를 했나보다 하고 생각하였다. 그녀는 저녁 8시 쯤 서울에 도착하여 회사 근처로 찾아왔다. 우리는 함께 저녁을 먹었는데 그녀는 계속 무엇인가를 기대하는 눈치였고 그것이 아닌 나는 그녀의 태도를 애써 무시하고, 같이 근무했던 사람들의 안부를 묻거나 함께 했던 군대시절의 추억담을 이야기 하였다. 다른 사람을 통하여 나중에 듣고 보니 그녀는 내가 보낸 엽서를 받고 그 내용은 그냥 안부 인사였지만 싯귀가 적혀있고 그림까지 담겨 있으므로, 동료 노처녀 간호장교들끼리 이 엽서가 내포한 connotation 의미는 무엇일까를 한참 상상하고 토론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 엽서가 내가 그녀를 좋아한다는 고백이라고 잘못 결론을 짓고는 간호부장에게 긴급 휴가를 요청하여 로미오를 그리는 줄리엣처럼 그 길로 서울로 달려왔다는 것이다. 졸지에 황당한 상황을 맞은 나는 이게 아닌데, 그런 뜻이 아니라고 굳이 변명하여 그녀를 실망시킬 용기도 나지 않아서 근사하게 식사대접을 하고 군대에서의 추억담만 한참 횡설수설하다가 그녀와 헤어졌다. 그리고 그때서야 노처녀에게 함부로 엽서를 보내면 안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정대위님도 어디선가 잘 살고 계시겠지.. 지금은 그녀도 할머니가 되었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