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군대생활 11
25. ROTC 단복과 휴가
내가 연대에서 사단으로 복귀명령를 기다리고 있는 동안 6개월 이상이 지나갔다. 연대에서 보직이 없는 상태가 계속되면서, (의무중대장 군의관 육순황 대위님이야 물론, 내가 의무중대에 있거나 말거나 별로 상관도 안하시고 연대의 다른 참모들은 내가 자기네 소속인 줄도 모르고 있으니) 내가 특별히 할 일도 없었고 나를 찾는 사람도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이런 생활이 슬슬 지겨워지던 어느날, 사단에 들렀을 때에 군의관 장동원 선배를 만나 현재 보직이 없어 붕 뜬 상태라고 나의 이런 상황을 우스개처럼 이야기하니 형이 정색을 하고 말하기를 “ 야, 그럼 너는 집에 가기 얼마나 좋으냐, 나 같으면 연대에는 사단에 심부름 간다고 하고 사단에서는 네가 연대에 있는 줄 알고 있으니 아무도 찾지 않는 그 사이에 6개월은 집에 가 있겠다” 하시며 심지어 누가 찾으면 형이 돌아오라고 연락해주겠다는 말까지 하면서 집에 가라고 부추기셨다.
흠, 그러고 보니 그것도 그렇네! 그런데 휴가증이 없지 않아! 그래서 집에는 가고 싶고 쯩은 없고 해서 궁리 끝에 내가 휴가증 없이 집에 가는 방법을 생각해 내었다. 즉 전방에 올 때 애착이 가서 더블백에 함께 넣어 가지고 온 ROTC 단복이 생각이 나서 2년차 명찰에 학교 뱃지까지 그대로 붙어있는 그 옷을 입고 서울로 나간 것이다. 헌병들은 교복을 입은 나를 당연히 학생이라고 생각했는지 전혀 검문 검색 없이 서울까지 무사통과 시켜주었고 이리하여 나는 원하면 아무 때나 쯩없이도 서울에 나올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심지어는 대학동창들에게 조차 소문이 나서 나는 '아, 걔!, 군대에서 교복입고 휴가 나온 애!' 가 되고 말았다. 지금 생각하면 치졸한 방법이었고 부끄러운 일이나 그 때에는 왜 그렇게 서울에 가고 싶었고 그 방법 밖에 없었다고 생각되었는지 모르겠다. 장교 자격이 없는 날라리라고 동기들이 비난하는 소리들이 빗발치는 듯하다. 미안해..
그렇다고 내가 장선배님 말대로 마냥 서울에 간 것은 물론 아니다. 처음에는 산 속에 갇혀있다는 답답한 마음이 들어서 서울에 가고 싶었지만 몇번 나오다 보니 별 것도 아니고 서울에 가봤자 별로 반기는 이도 없었고 해서 특별한 일이 있지 않으면 서울 나들이를 하지 않았다. 그래도 믿기지 않겠지만, 이 교복을 입고 서울에 가는 길에 서부 전선 기갑연대에 들러 그곳에서 근무하던 광준이를 만난 적도 있었다.
나는 부대에서 보직은 없어도 대부분의 경우, 의무중대 출근하여 의무중대 병사들과 함께 어울리거나 퇴근 후에는 육순황 대위님, 김승환 소위와 선임하사들과 가끔 저녁을 먹거나 술을 마시러 다녔다. 이 때에 다목리 삼거리에 술집 겸 음식점이 하나 있었는데 그 음식점의 주인은 우리 15기 동기 보병 소대장의 어머님이셨다. 우리가 가면 아들 친구들이 왔다고 하시며 두룹적이나 고추장 찌개 같은 공짜 안주도 만들어 주시고 특별히 잘 해주셨는데 알고보니 대구에서 음식점을 하시던 부부는 아들이 최전방 말단 소대에 소대장으로 오게되자 가게를 팔고 아들이 근무하는 최전방 부대 옆에다 음식점을 차리셨다는 것이다. 아무리 외아들이라지만 그렇게까지 하신 그 부모님의 사랑에 나는 코 끝이 시큰해졌다.
또 이곳에서 연대 통신대에 고등학교 동창인 15기 동기 이상돈 소위를 만나 자주 밥도 먹고 친해졌는데 이 친구는 말빨이 쎄서 유명한 사람들이나 유명 정치인들의 개인사에 정통하였고 이야기하다보면 모두가 자기가 잘 아는 사람들이고 모두가 자기 동네 옆 집 사람이라는 식이었다. 제대하고 나중에 들으니 그는 외환은행에 들어갔다가 당시 외환은행장의 사위가 되었고 서울 강남을 포함한 여러 곳에서 외환은행 지점장으로 근무했다고 한다. 그 당시 ‘오동잎 ’ 이라는 노래가 유행했는데 일제 산요 카세트기를 사서 그와 함께 노래를 들으며 삼거리를 걷던 생각이 난다.
비오큐는 위관장교들이 바빠서 잠만 자고 나오는 곳이 었고 서로 얼굴 마주 칠 일이 많지 않아 별 교류도 없었지만 큰 소주병에 사병들이 캐 온 더덕을 넣고 소주를 넣어 담근 더덕주를 발로 굴리며 책을 보던 ROTC 14기 보병 소대장 오중위 선배님이 생각 난다. 그 때에는 동기들과 함께 한달에 두번쯤 버스를 타고 육단리에 나가 이발과 목욕을 하고 중국요리를 사 먹거나 외식하는 것이 유일한 낙이었다. 또한 이때에 고등학교 선배 한 분이 50연대 1대대 의무지대 에서 군의관으로 근무하였는데 그분은 출퇴근도 하지않고 아예 내무반에서 야전침대를 가져다 놓고 병사들과 함께 먹고 자면서 영문으로 된 두꺼운 병리학 책 등 교과서들을 요약 정리하고 타이프를 쳐서 연애 중이던 동급생 약혼녀에게 우편으로 보내는 것을 취미로하는, 군대를 학교 도서관처럼 이용하며 공부에만 매달리는 모범생 군의관이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물러 터진 군의관이지만 의무지대장이 곁에서 자기들과 24시간을 함께 지냈으니 병사들은 은근히 괴롭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