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운영 회장의 생활칼럼 시즌3] 6탄- 북한과의 무역 거래
1985년 이후 홍콩에 정착해 살면서 북한과의 무역을 한다는 중국인 혹은 한인들과 많이 접촉하여 보았으나 비즈니스의 성질상 구체적인 거래내용을 파악하기가 어려웠다. 왜냐하면 공개적으로 이야기할 수 없고 항상 위험성이 따랐기에 은밀하게 아주 소수의 업체만 가능했던 비즈니스였다. 하지만 홍콩은 자유무역항이라 그 당시 주위에서 소수의 중국인 그리고 한인들이 북한과의 무역 거래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 공공연한 비밀이었고, 나는 무역 성격상 공산국가인 북한과의 무역을 하고 있는 비즈니스맨들을 약간 미스테리한 분들로 여기고 있었다. 특히 군대 생활 중에는 총칼로 무장하고 철책선 너머로 북한군들과 마주 보고 최전방에서 대남방송을 들으면서 적군과 대치하였고, 북한군의 남침에 대한 경계 태세에 밤새워 보초를 섰던 기억이 남아있었던 상태라 비록 세월이 흘렀지만 북한 관리를 만나는 것조차 마음이 편치 않았기에 아예 북한 관련 무역은 처음부터 관심이 없었다. 당시에 북한도 개방을 추진하기 시작하였던 시절이었고 남북화해 분위기는 개선되고 있었다. 하지만 외화가 없었던 북한 관련인들과의 무역협상은 대부분 진전이 없었고 항상 계약의 성공 결과가 거의 없었다고 알려졌었다.
한편 주위에서 북한무역을 추진하여 북한을 방문하는 사례도 소문으로 듣게 되었고, 호기심이 발동한 몇몇 지인들도 초기 북한무역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중국에서 제조업을 하고 있었던 나의 경우는 직접 북한 관리들을 만나지는 않고 종합상사원들을 통하여 북한무역 관리들에게 생필품인 우리 Silver Star 주방용품을 북한에 소개하게 되었다. 하지만 종합상사원에 따르면 미팅마다 대금 지급에 대한 사항을 북한산 제품과 우리 제품을 물물교환(barter trade) 방식으로 하자는 요구로 거래 자체의 위험성이 너무 컸기에 성사가 될 수 없었다는 전언이었다. 더욱이 우리 집안의 경우에는 남북분단의 아픔이 할아버지 대에서 있었기 때문에 대북 관련 접촉에 더욱 신중을 기하게 되었다.
1930년대 말에 큰할아버지 가족들이 전부 만주로 이주해서 만주 지방에 정착한 후 정미소를 운영하였고, 중국공산당 시절에 지주계급의 토지몰수를 겪고 모든 가족이 하얼빈으로 이주하여 생활하였다. 큰할아버지의 장남은 당시에 하얼빈의대를 졸업한 후 북한의 김일성 체제에서 초청을 받아 군의관으로 6.25사변 중 인민군에 참전하여 활동하였다는 슬픈 가족사를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통하여 전해 들었다. 차남이셨던 나의 할아버지와 종조부 가족들은 남한에 남아서 한국전쟁을 겪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한 형제끼리 집안에서 남과 북으로 나뉘어서 전쟁을 치르게 되었다.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이야기가 우리 집안에도 실제로 있었다. 내가 어릴 때에는 연좌제라는 법률(1980년 폐지)이 있었기에 가족의 슬픈 역사에 대하여 서로 쉬쉬하고 지냈다. 중국과 대한민국의 수교와 남북관계가 약간 개선되었던 1990년대 말부터 하얼빈에 살고 있었던 친척들은 한국을 왕래하게 되었다. 한국에 나와서 열심히 공장과 식당일 등을 하였고 여러모로 모든 친척들의 생활 여건이 한결 나아지게 되었다. 하지만 북쪽의 친척들은 아직도 왕래가 불가하고 어려운 경제체제 하에서 초근목피의 생활을 하고 있는 것으로 추측된다.
2007년경으로 기억되는 어느 날이었다. 본인이 미국 시카고 전시회(Fair)에 다녀온 후 사무실에 출근하니 부재중 전화한 사람의 전화번호를 비서가 정리하여 책상 위에 놓아두었다. 그중 '이 영사'라고만 전화번호가 적혀있는 메모를 발견하고 다이얼을 돌렸다. 뜻밖에 상대방의 목소리는 북한 말씨의 '이 영사'라는 사람이었다. 영화에서 들었던 북한 말씨였다. 당연히 한국 총영사관의 '이 영사' 인줄 알고 전화했는데 상대방이 북한 총영사관의 '이모'영사라고 신분을 밝혀주어서 너무 깜짝 놀랐다. 영어로 되어있는 비서가 건네준 메모지에는 북한인지 대한민국인지 표시되어있지 않았고 나는 당연히 대한민국 총영사관인 줄 알았다. 난감한 상황에서 점잖게 "무슨 일이시냐?"고 물었고, 이 영사의 대답은 며칠 전 홍콩 백화점에서 실버스타의 주방용품을 구입하였고, 북한 홍콩 총영사관에서 본국에 주방용품을 선물용과 백화점 판매용으로 수입하고자 한다고 하였다. 본인에게 북한 총영사관으로 샘플을 들고 와서 상담을 해줄수 있느냐고 물었지만, 북한 총영사관에 직접가서 상담을 하기에는 너무나 부담스러웠다. 마치 본인이 스스로 휴전선을 넘어서 북쪽으로 넘어가는 것처럼 아주 무시무시한 상황으로 다가왔다. 나는 샘플의 종류가 많고 어떤 종류를 선정해야 할지 모르니 상대방이 실버스타(Silver Star) 사무실로 와서 상담해야 한다고 하였고, 이 영사는 다시 한번 체크 후 연락하겠다고 전화를 끊었다. 이러한 북한 총영사관 주도의 연락으로 대북 접촉을 한 번도 해보지 않았던 본인은 적잖이 놀랐지만 엎질러진 물과 같은 상황이었다. 이 영사쪽에서 몇 시간 후에 혼자 올 수 없고 다른 동료 영사와 같이 올 수 있다고 하여 홍콩섬 완차이 지역에 있는 북한 총영사관에서 Tsuen Wan(荃灣)의 Silver Star 쇼룸으로 와서 대면상담을 하게 되었다. 우리 회사에서 직접 처음 만나보는 북한사람들이었으니 묘한 분위기가 흘렀고 한편으로는 어색하기도 하였다. 군 생활에서 마주 보며 총칼로 무장한 상태로 전방 고지에서 대치하던 적군 사이에서 머나먼 타국인 홍콩에서 민간인 복장으로 비즈니스를 한다며 회사 쇼룸에서 마주 앉았으니 격세지감이었다.
평소에 북한무역을 한다는 많은 사람들을 대할 때마다 북한무역은 결제 관계가 가장 중요한 조건이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물건을 인도한 후 결제를 받지 못하여 낭패를 본 것이 대부분이라고 귀에 따갑게 들어온 터라 30% 보증금을 계약 시 받고, 70%는 물건을 인도 시 현금으로 받기로 하였다. 생각과 달리 모든 사항을 상대방이 쉽게 동의해 주었고, 단지 물건을 초고속으로 준비해주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아마도 행사에 긴급히 사용할 상품이었던 것으로 추측할 뿐이었다. 제일 까다로운 조건은 포장에 한글이나 중국어를 절대 쓸 수 없고, 제품에 Made in China 혹은 Korea라는 표기를 금지하였다. 중국 제조품은 값싼 제품이라 회피하는 것이고, 당시에는 남북이 대치 중이라 남한의 품질 좋은 제품을 수입해서 당성이 강한 고급 간부들에게 선물로 줄 수는 없었을 것이다. 미팅이 있은 지 정확하게 한 달 만에 처음으로 북한에 우리 제품을 수출하고 대금을 100% 받을 수 있었다.
올해로써 홍콩에서 북한무역을 유일하게 한번 경험한 지 10여 년이 훌쩍 넘었다. 하지만 아직도 남북은 통일이 되지 못한 상태로 북한의 핵실험 발사만 일방적으로 쳐다봐야하는 상황이고, 남북간 무역 교류는 유엔 제재 위반으로 국제사회의 지탄을 받고 있다. 근본적으로 한치도 변하지 않은 소강상태임이 너무나 안타까운 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