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운영 회장의 생활칼럼 시즌3] 1탄- 홍콩 정착기
칼럼 소개: 김운영 회장의 칼럼 시즌 3을 시작합니다. 이번 시즌 3에서는 김운영 회장과 그의 가족이 홍콩에 정착한 이후의 생활과 비즈니스 활동들을 중심으로 기획했습니다. 칼럼은 [1탄 홍콩 정착기]와 [2탄 홍콩 창업 이야기], [3탄 홍콩 뉴월드 그룹과의 인연], [4탄 말레이시아 플랜트 수출 이야기], [5탄 보람공장 이야기], [6탄 북한과의 무역 거래], [7탄 다니엘의 중국 공장 생활기], [8탄 발자노 브랜드 이야기], [9탄 홈쇼핑 이야기], [10탄 정관장 중동시장 마케팅 실패기]로 구성하였으며 매주 연재됩니다. <편집인>
나는 거대한 중국 건설시장 진출을 위하여 싱가포르에서 한국을 거치지 않고 1985년 9월 초에 바로 유원건설 홍콩지사장으로 파견되었다. 따라서 가족이 이사하기 전에 거주할 아파트와 사무실 임대 등을 어레인지하기 위하여 혼자서 홍콩을 사전방문하였다. 사무실 임대의 경우는 당시에 회사의 재정 상태가 썩 좋지 않아서 싱가포르 사무실 경우와 같이 홍콩에 거주하는 한인교포(신영수 사장)의 사무실 일부를 임대하여 업무를 시작하기로 하였다.
여러 가지 현지 사항 체크로 며칠 내에 바쁘게 출장을 마무리하다 보니 하루 만에 숙소를 지인의 도움으로 성급하게 계약하였다. 싱가포르에서 아파트를 가격만 고려하고 혼자서 임대한 후 후회막심한 경험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홍콩에서도 역시 혼자서 현지 지인과 하루 만에 후다닥 결정하고 시세보다 좀 비싸게 계약을 하여 아내와 가족들이 생활하는데 가장으로서 상당히 많은 불편함과 괴로움을 안겨주었다. 회사 일에 있어서는 엄청 까다롭게 따지지만 가정일에 관해서는 항상 세심하지 못한 성격 탓에 문제가 발생하면 고생은 고스란히 아내 몫이 되었다.
홍콩은 동양의 진주라는 명칭에 걸맞게 방문객이 매년 증가하였고, 한국과 지리적으로 가까운 관계로 본사에서 해외로 출입국 하는 중간 경유지로서 나는 많은 손님치레를 하게 되었다. 어릴 때부터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무척 좋아하는 성격이라 출장 중인 지인들을 우리 숙소로 불러들여 숙식을 제공해야 직성이 풀렸다. 1968년에 완공된 후 한 번도 개보수를 하지 않은 제일 낡은 아파트에다 18평 정도의 작은 평수여서 손님이 같이 지내기에는 너무나 좁은 공간이었다. 조그마한 거실과 주방이 개방형으로 붙어있고, 침실이 2개였지만 손님방은 아예 침대를 놓을 수 없는 작은 다다미방이었고, 안방도 아이들 침대를 따로 놓을 수 없는 크기였다. 하지만 손님이 방문하는 날이면 아이들과 같이 안방에서 지냈다. 호텔비용을 아껴준다는 핑계로 손님을 불러들이는 남편의 고질병(?)을 고칠 수 없었던 아내는 남편의 이런 요구를 고스란히 따라야 하는 개인의 사생활이 거의 없었던 힘든 시절이었다.
그런데 이곳 Mei Foo(美孚)에서 잊을 수 없는 좋은 일은 부모님이 손꼽아 기다리시던 장손 다니엘(광범)이 태어났다는 것이다. 몇 년 뒤 우리는 샤틴(沙田) 지역으로 곧 이사했지만 절친 Mrs Kwok(郭太太)도 이곳에서 처음 만나게 되었고, 딸을 가정탁아소에 맡기고 그토록 원했던 중문대학교 언어원에도 다니기 시작했던 곳이라 아내에게는 그래도 Mei Foo가 추억이 깃든 동네일 것이다. 한편 이곳에서 아내는 미국인 여자 선교사들과 친하게 지냈고, 그들로부터 영어 성경을 배우면서 자연스럽게 크리스찬이 되었다. 그 당시 미국침례교에서 홍콩에 파견한 선교사 가족들이 이곳에 많이 거주하고 있었고, 아내는 영어 회화를 배울 목적으로 이들과 적극적으로 어울렸고, 영어 성경 공부(Bible Study Group) 모임에도 빠짐없이 참석하였다.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뜻의 Dora라는 아내의 영어 이름도 이때 미국인 여자 선교사가 지어주었다. 나는 홍콩에 정착 후 아내가 영어권 사람들과 사귈 목적으로 처음에 다녔던 Baptist Church(침례교회)의 미국인 목사님이 설교하는 영어 예배에 참석했다. 중고생 시절과 싱가포르에서 잠시 성당에 다녔던 나에게 홍콩에서의 교회 생활은 처음에는 많이 낯설었지만 사실 주일에 가족과 떨어져서 혼자서 성당에 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 당시 홍콩은 대중교통수단인 지하철(MTR)이 주거밀집지역을 모두 연결하여 지하철이 없었던 싱가포르보다 훨씬 살기가 편리했다. 또한 뚜렷한 사계절은 없었지만, 한여름만 지나고 한국의 겨울쯤에는 늦가을 정도의 선선한 날씨라서 싱가포르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무척 좋은 날씨라고 느꼈다. 홍콩은 음식의 천국이어서 얌차(Dimsum)로 대표되는 아침과 점심은 미식가인 나에게는 언제나 즐거운 홍콩 생활의 일부였고, 홍콩 사람들은 아침 식사부터 외식이 생활화 되어 있었다. 한국에서 살았다면 봉건적인 가정에서 자란 내가 아내와 아침부터 외식을 즐기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그 당시에도 가족과의 값싼 주말 외식비는 아끼지 않았다. 그 당시 중국 비즈니스를 위해서는 중국어를 배우는 것이 급선무였다고 판단하였고, 홍콩파견 후 곧바로 중문대학교의 언어원에 아내와 같이 입학을 하였다. 결혼 전 했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그동안 모아둔 월급으로 아내의 비싼 학비를 감당하였다.
사실 최효석 회장님은 내가 비서실에서 고생하며 가까이 모셨다고 해외지사 파견까지 해주셨고, 홍콩에서는 중국 시장진출 대기 중에 교육비 지원도 해주셨으니 감사할 따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과의 공식적인 외교관계가 수립되지 않았고, 실적도 없는 상태에서 나는 본사로부터 엄청난 정신적인 압박을 받으면서 매일 귀국에 대한 명령을 기다리는 하루살이 생활의 연속이었다. 장미빛 뉴스에 비해 중국 건설시장은 신속하게 열리지 않았다. 홍콩 내의 로컬 건설시장도 진출이 어려운 상황이어서 거의 포기상태였다.
1987년 중순에 마침내 본사로부터 홍콩사무실을 폐쇄하고 귀국하라는 명령을 받게 되었다. 몇 년간의 해외 생활로 이제는 본사로 귀임하면 국내 생활의 적응이 자신이 없을 만큼 나 자신이 많이 변해 있었다. 무엇보다도 아이들의 장래 교육 문제를 심각하게 고려하게 되었다. 아이들에게는 아비가 어릴 때 겪었던 열악한 환경을 물려주고 싶지 않았다. 또한 다시 본사에 들어가서 조그마한 아파트에 어머니를 모시고 계속 한국의 월급을 받아서 살려고 생각하니 막막할 뿐이었다. 최악의 경우 홍콩에 남아서 여행 가이드나 식당일을 하더라도 벌이가 오히려 나을 것 같았던 시절이었다. 그동안 한국을 떠나서 몇 년 동안 자유로운 해외 생활을 한 후 귀국하여 또다시 유원건설에서 층층시하의 답답한 조직 생활을 할 것을 생각하니 귀임에 대한 회의가 앞섰다. 하지만 나는 지금까지 키워주신 유원건설 최효석 회장님에 대한 은공을 퇴사로써 배신할 수 없었던 고뇌의 갈림길에 서 있었다.
<다음 호에서 시즌 3-2탄 [홍콩 창업 이야기]편을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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