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군대생활 8
19. 포사격 측정에 관한 전설
지난번 포사령부 군의관 윤중위님으로 부터 들은 이야기. 포병대대에 12기 인가 전설적인 ROTC 선배가 한사람 있었다는데 사단에서 포대 대항 포사격 측정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보통 산너머 표적지에 아홉 발을 쏘아 5, 6발 정도를 맞추면 1등이고 대부분의 포대는 서너발을 맞추는데 이 선배는 9발을 모두 정확하게 명중시켜 측정관들을 기절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사단장이 표창장을 주며 비결을 물었더니… 그는 포가 있는 지점부터 목표지점까지 거리를 두명의 사병과 함께 걸어서 실제로 재어 측량하고 방향과, 고도, 탄도를 계산하였다는데 포병이 아닌 나는 이것이 거짓말인지 정말 가능한 일인지 아직도 모르겠다. 포병들, 대답 좀 해줘 ! 이게 가능한 일일까 ?
20. 신임 군의관의 도착과 연대 의무중대로 전출
1977년 9월 말에 새로 임관한 군의관이 교육을 마치고 15사단 50연대 3대대 의무지대장으로 오게되어 나는 그에게 의무지대를 맡기고 15사단 50연대 의무중대로 돌아가게 되었다. 엄밀하 말하면, 사실은 나는 사단 의무대대에서 50연대 3대대에 일시적으로 파견을 나온 상태였고 제3대대에 군의관이 새로 부임하였으므로 나에게는 사단으로 복귀하라는 명령이 나야하는데 웬일인지 그 명령이 내려오지 않는 것이었다. 그리고 연대 의무중대에는 이미 기술한 육순황 대위님이 의무 중대장이었고 기술행정사관 출신의 김승환 소위가 의무중대 부중대장이었으므로 나는 특별한 보직이 없는 상태로 그냥 오갈데 없이 의무중대에 있게 되었다. 연대 의무중대는 대대 의무소대보다 규모가 더 컸지만 주임상사 한 분과 선임 하사관 으로 두명의 중사가 있었고, 보병으로 치면 1개 소대 정도 규모로 주 임무는 대대 의무지대들을 지원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두명의 중사 중 한 사람은 3대대에서 선임하사를 하시던 분으로 나에게 많은 조언을 하셨던 분인데 하사에서 중사로 진급을 하면서 3대대 선임하사에서 연대 의무중대로 오게된 것이었다. 그에 관하여 기억나는 일은 그는 테니스를 칠 때도 실내에서도 항상 모자를 쓰고 있어서 몰랐는데 어느날 목욕탕에서 보니 머리카락이 하나도 없어서 깜짝 놀랐던 기억이 있다. 군에 오기 전에 X ray 기사였다는데 방사선에 많이 노출이 되어 젊으신 분인데도 머리카락이 다 없었졌다는 소문이었다. 그분은 세상 물정, 군대의 속 사정을 모르는 나를 여러가지로 많이 도와주셨고 내가 제대한 후에도 회사로 나를 몇번 찾아올 정도로 가깝게 지냈었다. 그 당시 하사관들은 모두 결혼을 하여 다목리에서 방을 얻어 살림을 살고 있었는데 두명의 중사는 진급 때문에 경쟁이 심해서 그랬는지 서로 앙숙이었고 매우 사이가 나빠서 중간에서 나는 그들을 화해시키느라 애를 많이 먹었다..
21. 제대 전에 몸조심
또 하나 기억나는 일이 있는데 그 당시에는 제대를 하려면 사병들이 말단 부대로부터 계속 올라오면서 대대장님께 신고하고 연대로 가서 하룻밤을 자고 연대장님께 신고를 하고 다시 사단으로 가서 사단장님께 제대신고를 하고 제대하였던 것으로 기억이 된다. 그런데 어떤 병사 하나가 다음 날 전역신고를 하러 대대에 올라왔는데 밤에 숨쉬기가 힘들고 가슴이 몹시 아프다고 하면서 의무대에 치료를 받으러 왔었다고 한다. 그러나 군의관은, 하룻밤만 자면 제대이니 제대하고 나가 민간 병원에 가서 치료 받으라고 하면서 무심히 넘겼는데 그 다음 날 보니 안타깝게도 그 병사는 이미 사망한 뒤였다.
그러자 의무대에서는 쉬쉬하며 은밀하게 원인을 규명하고 책임을 묻기 위한 조사가 시작되었다. 그의 사망 원인 나중에 폐색전증 (Pulmonary Embolism: 동맥경화증 등 여러가지 원인으로 혈관의 상처가 생기고 그 곳에 피떡이 지며 그 혈액 응고 덩어리가 혈관을 타고 돌다 심장으로 가는 폐동맥을 막아 산소공급이 안되어 사망하게되는 급성 질환) 으로 밝혀졌다. 그러나, 그 의료 감사를 한 사람들 또한 같은 상급부대의 군의관들 이어서, 가슴의 통증을 호소한 사병을 청진도 하지 않은 군의관의 잘못이 드러났으며 빨리 후송하여 응급조치를 했더라면 살릴 확율이 있었다는 이야기는 슬며시 묻혀지고 그의 상태는 워낙 안 좋아서 어차피 살 확율이 낮았다는 것으로 보고가 올라갔다. 어찌 보면 그때는 군대에서는 제대로 치료 받기도 힘들고 죽은 사람만이 억울하던 때 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