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우리는 하늘의 백장미이다!!!
-학군 15기 특수전투사령부 동기회 발대식을 마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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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6월 13일. 밤새 잠을 설쳤던지 몸이 개운하지가 않다. 1977년 임관한 학군15기 특수전투사령부 동기들의 모임이 시작되는 날이다. 경기대학교 김성수 교수의 열정어린 연락으로 5공수여단(흑룡부대)의 준비위원 역할을 맡은 나는 주소록을 확인하며, 전역 후 30년동안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동기생들과 전화기 안에서 주고받은 반가움과 괜한 설레임으로 그 자리를 향했다.
그러나 32년 전의 기억도 아릿한 곳으로 여행을 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우선 모임 장소인 3공수여단으로 가는 길부터 어설펐다. 예전의 배추밭 사잇길과 소나무 무성하던 그 곳들은 모두 도시화되어 어디가 어딘지 분별할 수 없었다. 3공수특전여단인 비호부대 정문에서 들어섰다. “단결!” 굵고 짧은 경례 구호였다. 가벼운 목례로 답했다. 나의 “단결” 구호는 목구멍 안에서 우물우물 넘어가고 있었다. 그래도 가슴이 한껏 부풀었다. ‘쓱’ 어깨에 힘을 주었다. 부대 안을 살폈다. 어디가 어디인지 도대체 기억이 나지 않는다. 3공수여단 비호회관에서 바라본 부대는 초록이 가득 찼다. 아직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모임 2시간 전이다. 너무 호들갑을 떨었나 보다. 커피 한 잔을 타서 베란다에 나섰다. 숲 속 저 편 어디에서인가 1977년 그 여름의 뜨거운 땀이, 함성이 되살아나는 것 같았다.
우리 동기들이 3공수여단을 특별히 기억하는 이유는 이곳에서 공수훈련을 받았기 때문이다. 특전사령부 교육단에는 이미 다른 교육 일정이 있어서 우리는 임시로 만들어진 3공수특전여단 잠정교육대에서 4주간의 훈련을 받아야 했다. 숙소는 헬기장에 마련한 야전 천막이었다. 한 여름의 천막 안의 열기는 40도를 오르내리고 있었다. 비가 오면 침대 밑이 시내가 되어 흘렀다. 우리는 소위 계급장을 떼어 내고 각각의 번호판만을 붙인 채로 훈련을 받았다. 1교시 PT와 폭풍구보로 시작하는 그칠 것 같지 않던 체력단련이 끝나면, 기내 동작과 기체문 이탈, 공중 동작, 접지에 이르는 그 지겹고 단순한 반복을 죽도록 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것을 이어 놓은 8자 돌림의 숨가쁜 훈련은 사지를 흐느적이게 하였다. 낙하산이 바람에 끌리는 것을 가상한 송풍 훈련은 젊음의 등짝에 상처를 만들어 놓았다. 막타워 위에서 마구 질러댄 ‘죽어도 좋습니다’라는 함성과 매일 다르게 불렀던 애인의 이름은 아직도 그 허공에 남아 있었다. 날카로운 줄기만 남은 보리밭에서 취침과 기상을 반복하여 만든 피어린 상처에 행정학교 옆의 오물 연못은 염증을 일으키는 공장이었다. 우리들은 ‘차라리 죽여라’ 라는 구호로 스스로를 위로하고 있었다. 훈련이 끝나가던 어느 토요일, 갑작스레 낙하 훈련 일정이 바뀌었다 하며 비행장으로 데려가 C-123 수송기에 싣고는 김포공항 근처 행주나루 옆의 한강변 땅콩 밭을 DZ로 삼아 하늘에 온통 꽃 같은 낙하산을 뿌려 놓았다. 그렇게 첫 강하를 마친 나는 낙하산을 접어 깔고 앉아서 겁도 없이 담배 한 대를 피워 물었다. 참 아름다운 하늘이었다. 동기들의 얼굴에 안온한 미소들이 가득하였다. 그 후로 우리는 3회나 더 강하를 하였고, 수료식을 하면서 가슴에 공수 휘장을 달았다. 그날부터 우리는 하늘의 백장미였다. 그 후로는 나는 3공수여단에는 다시 가지 않았다. 공수교육을 마치고 우리들은 특전사 교육단에서 특수전이라는 교육을 12주나 더 받았다.
시간이 다가오자 동기들이 모이기 시작하였다. 서로 인사는 하지만 기억의 저편에서 서로를 불러내는 일은 쉽지 않았다. 서로가 적당하게 낯선 거리에 있었다. 그러나 같은 학군단 출신이거나 같은 여단의 동기끼리는 급격하게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세월의 거리는 금방 사라지고 말았다. 그렇게 모이기 시작하였다. 발기식 모임이 시작되었다. 9공수여단 이진팔(경북대)이 사회를 보고 경과보고를 했다. 1공수여단 김성수(경기대)가 회장으로 뽑혔다. 김성수교수는 이 모임을 위하여 바쁜 가운데에도 여러모로 고생을 많이 하였다. 다음에는 더 많은 동기들이 모일 수 있도록 여단별 조직도 준비를 했다. 중앙회에서 활동하는 동기(박성렬 회장, 홍융기 수석, 오자진 복지위원장, 이충희 고문)들도 축하차 왔다, 각 여단 출신끼리 모여 앞으로 나와 인사를 했다. 3공수여단이 가장 많이 모였다. 시간이 지나자 기억들이 벽을 허물고 다가서기 시작했다. 그렇게 47명이 참 오랜만에 만난 통 큰 즐거움을 나누었다. 특전사 부대가인 “검은 베레모”를 불렀다. 참 오랜만이다. 등줄기에 힘이 붙었다. 갑자기 온몸이 후끈 달아오른다. 그리고 몰래 눈시울이 젖었다. 괜히 목소리가 커졌다. 사회를 보는 이진팔의 눈이 빨개졌다. 군가 끝에 짧지만 오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우리는 뜨거운 포옹을 이어나갔다.
사령부 역사관(구특전회관)은 특전사령부의 역사를 담고 있었다. 예전에는 제법 크게 보였는데, 지금은 생각보다 작아 보인다. 11공수여단과 13공수여단은 부대가 멀리 이전하여 옛날의 추억은 전설이 되었다. 5공수여단은 부대가 축소되어 특수임무부대라 하여 대령급이 지휘한다고 한다. 특전사의 역사관은 광덕산 간첩 사건과 10․26과 12․12 그리고 부마항쟁과 5․18을 겪고 전역한 나에게는 현대사의 한 폭을 회고하게 된 시간이었다.
14기 선배들은 우리의 기억 저편에 서있었다. 특전사로 전입올 때에 3공수여단의 14기 선배들이 인솔하였다. 퀴퀴한 냄새와 찢어진 특전복, 구두약 흔적이 사라진 전투화, 덥수룩한 수염, 거미줄 묻은 베레모는 그들이 장교라고 말하기에는 너무 거리가 멀었다. 3공수여단에 도착할 때까지 선배들은 우리에게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그 선배들 가운데 몇 사람은 공수교육단의 교관이거나 행정을 맡아 있었다. 14기 선배들이 우리들의 모임을 축하려고 찾아 왔다. 윤승준, 김기준, 김영원 세 분 선배님께 감사드린다.
이 번 행사의 대부분은 사령부에 근무하는 동기인 윤재정 대령의 장소 협조와 각종 행정조치를 바탕으로 이루어졌다. 감사드린다. 23시 경 우리는 게릴라 베이스를 특전회관으로 옮겼다. 이날 저녁부터 본격적인 작전에 들어간 우리들은 예전 그대로의 모습으로 공격을 시작했다. 이전부터 시작한 비호회관의 작전이 소규모전투이었다 하면, 23시경에 시작한 공격은 그 끝을 모르고 있었다. 날이 새어서야 32년전 특수전 행군의 시작이었던 그 남한산성에 올라서 마지막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머리털이 허연이들의 젊은 등어리에는 추억과 그리움이 햇살로 남아 있었다.
이제 우리는 다시 만날 날을 고대하고 있다.
다른 부대의 동기회에 비해 그 시작은 늦었지만 하늘의 백장미로 다시 피어날 것이다.
이제 학군 15기 특수전투사령부 동기들은 가장 뜨거운 열정으로 특별한 만남으로 이어갈 것이다. 그리고 이 모임이 우리들만의 것이 아니라. 15기 동기회의 초석이 되기 위하여 노력할 것이다.
글쓴이 : -제5공수특전여단 이근영(건국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