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인생일기>
안뇽하십니까?
이제 교단을 떠나는 나의 인생일기 입니다.
나는 피난시절 부산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2학년때 흑석동으로 이사를 와서
서울생활을 시작했다.
은로초등학교-배문중.고등학교-숭실대학교-평택대학원을
거치면서, 1979년 8월 16일 낯선 땅 안성에 있는 '안성여자상업고등학교(현재 가온고등학교)'로 임용이 되어 그곳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죽산상업고등학교와 안성여자중학교, 안성중학교, 비룡중학교를 거치며 고등학교에서 열 여덟해, 중학교에서 열 다섯해, 모두33년의 교직생활을 하고, 이제 드디어 2012년 2월 29일 자로 교직을 떠나게 된다.
ROTC15기로 임관되어 17연대에서 소대장 2년의 기간도 새롭다.
긴 듯 하면서도 참으로 짧았던 33년이다.
담임과 학년부장으로, 학생부장으로, 그리고 상담부장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참으로 재미있게, 신나게, 즐겁게 학생들과 함께 살았다.
그리고 지난 2월9일 드디어 정든 나의 마지막 학교, 비룡중학교에서 간단한 퇴임식을 가졌다.
엊그제 2월 25일에는 나의 첫사랑(?) 나의 첫 제자들 22명이 안성 고삼 저수지에 있는 경치좋은 '나이테 레스토랑'을 빌려서 서울에서, 용인과 수원과 천안과 안성에서 모여 들어 참으로 아름다운 퇴임 축하식을 해주었다. (이 제자들의 나이는 1회 졸업생 51~40세 정도이다)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다 기록하려면 꽤나 많은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여기서 새삼스럽게 조금만 나열해 보련다.
처음 만났던 제자들은 총각선생님이 서울에서 왔다고, 여학생들이 꽤나 좋아했다.(착각이지만) 그 녀석들과의 만남이 참으로 나에게는 행복이었다. 엊그제 만난 그 친구들이 이런 저런 그때의 이야기를 해 주는데 참으로 감격스러웠다.
수업시작하면서 칠판에
'사람공부'
'즐겁게 살자'
'생활의 즐거움은 스스로 창조하는 것이다'
이런 글들을 써 놓곤 했는데 잘 기억하고 있었으며,
윤형주의 '우리의 이야기들' (웃음짓는 커다란 두 눈동자~~~)를 가르쳐 주었다고 다시 부르자고 해서 33년 만에 다시 신나게 함께 노래를 불렀다.
(~~~ 긴 머리에 말없는 웃음이 라일락꽃 향기 흩날리던 날 교정에서 우리는 만났소~~~)
그리고 제자들의 재롱잔치(?)에 뒤섞여 나도 하모니카 두곡 - 스와니강, 에델바이스와 색소폰 연주로 어니언스의 편지, 나훈아의 사랑 그리고 앵콜송으로 노사연의 만남까지 연주를 했다. ㅎㅎㅎ... 비웃거나 말거나 열심히 연주를 했다.
그리고 아들이 나와서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팝송도 한 곡 불러주었고...
좀 건방진 표현이지만, 약 15,000명이나 되는 제자들이 나의 손을 거쳐갔다.
그들에게 꿈과 희망을 노래했으며, 그래서 많은 학생들이 나름대로 인생을 아름답게 설계했겠지만, 또한 나로 인하여 얼마나 많은 학생들이 아픔을 겪었을까를 생각하면 갑자기 두렵고 떨린다.
초창기에 한 녀석은 나에게 많은 매를 맞아서 학교를 결석한 일까지 있었다.
아무리 큰 죄를 지었다해도 그렇게 해서는 아니되었는데...
이 자리에서 그 녀석에게 잘못했다고 용서를 빌어본다.
어떤 녀석은 선생님이 정말로 좋아서 교대를 갔다고 고백할 때는 눈시울이 적셔지기도 했다.
안성에 내려올 때는 거의 거지로 내려왔는데,
30여 년이 지난 지금은 그런대로 생활의 기반까지 잡혀있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고!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교편을 잡으면서 딸, 아들과 함께 참으로 신나고 재미있게 살아왔다. 가훈도 이렇게 썼다.
"즐겁게 살자. 뜨겁게 살자"
돌이켜보면 참으로 교직을 잡으면서 즐겁게 살아왔다.
그러나 정말로 뜨겁게 살았느냐고 묻는다면 자신이 없다.
자, 나의 제3의 인생은 이제부터다.
이제부터는 정말로 인생을 뜨겁게 살아보련다.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다짐을 했다.
남은 인생은 정말로 더욱 신나게 즐겁게 뜨겁게살자고...
그리고 철저하게 남을 돕는 생활을 하자고...
드디어 이제 나의 교직생활은 끝나고 있다
그동안 도와준 선후배님들과, 동기들과 친구들의 깊은 사랑에 진심으로 감사를 드린다.
감사합니다.
김기승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