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화과 나무에 잎사귀가 무성하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할지라도 감사할수 있는가? 외양간에 소가 있으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할 때에도 주를 신뢰할수 있는가? 포도 나무에 열매가 있으면 더 없이 좋으련만 그렇지 못할지라도 믿음의 동요가 없을수 있는가? 밭에 소출이 있다면 다행스런 일이겟지만 그렇지 못한 순간에도 여전히 기도의 자리에 머물수 있는가?
기도의 응답과 축복의 증거들을 믿음의 본질과 연관시키려 한다. 그러므로 기도의 응답이 풍성하고 바라고 소원하던 축복이 손에 만져지면 하나님은 살아계심이고 그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기도의 응답에 침묵이 흐르고 소원하고 바라던 일들은 저만치 물러가 남의 것이 될때 우리의 믿음은 송두리째 흔들리곤 한다.
나를 버렷거나 나를 떠난것이라고 단정 짖는다. 그러나 성경을 깊히 보면 믿음은 응답과 축복과 형통과 전혀 상관이 없다. 믿음은 계시적이며 은사적이다. 믿음은 내게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내게서 만들어진 믿음을 신념이라 부른다. 믿음은 주님으로 부터 흘러 내게 주어진 하늘의 선물이다. 그러므로 주어진 상황과 조건을 초월하는 에너지를 내포하고 있다. 그렇기때문에 믿을 사람은 욥같이 말도 안되는 일을 수없이 겪어도 더 잘 믿는다. 그러나 못 믿을 사람은 죽은 사람이 살아나도 못 믿는다. 똑같은 감옥에서 베드로는 석방되었으나 야고보는 순교를 당햇다. 베드로의 석방을 통해 하나님은 예루살렘 교인들의 기도에 응답하셧지만 야고보의 죽음을 통해 하나님은 예루살렘에 머물던 교회를 흩으사 전세계를 곳곳에 복음이 퍼지게 하셨다. 그때 생긴 교인들이 그 유명한 '디아스포라'이다. 하나님은 이와같이 이렇게도 하시고 저렇게도 하시며 당신의 일들을 이루어 가신다. 피조물인 인간이 침범할수 없는 하나님의 고유의 주권이며 영역이다.
믿음은 응답과도 무관하다. 믿음은 관계의 문제이다. 믿음의 실체는 예수 그리스도이다. 믿음은 거래하지 않는다. 믿음은 계산하지도 않으며 믿음은 조건을 요구하지도 않는다. 믿음은 지금 이대로 죽어도 황홀하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믿음은 하나님의 "하"자만 생각해도 주체할수 없는 기쁨의 동력이다.
모든 길이 막히고, 모든 가능성이 닫히고 모든 끈이 끊어진 순간일찌라도 믿어지는 믿음이 진짜 믿음일 것이다. 이것을 실제로 증명하고 노래한 분이 하박국 선지자이다. 그리고 잿더미에 앉아서도 믿음을 놓지 않았던 분이 욥이다.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하늘 위에서 임재한 불가항력적인 은총 가운데서 저절로 솟아 오르는 계시적 은사이다. 내게서 만들어진 것이 신념이라면 주로부터 임한 것이 믿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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