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법 삼국지-2] 대전략과 소전략
기산의 농토는 정전법에 따라 구획정리가 되어있다. 지형의 모양새에 따라 농토가 굴곡지고 물길이 있어 시냇물이 흘러도 열개의 논이 한 단위가 되고, 중심이 되는 논이 가운데 있어 나머지 아홉 개의 논이 둘러싸고 있는 형상을 이룬다.
즉 井자의 형상을 만들고 농토에서 부역하는 자들의 우두머리가 가운데의 논을 경작하며 물길을 조절하고 이해를 조정하며 농사와 위(魏)와의 전쟁을 병행하고 있었다.
이른바 천하의 논객이 말한바 있듯이 조조는 천하의 명(命)과 천시(天時)란 천자를 등에 업고 중원의 비옥한 지리를 이용해 누르는 형세를 구축하였고, 손권은 양자강 유역의 비옥한 토지와 함께 동해의 삼한과 왜 그리고 남만과 자유로이 해상무역을 할 수 있는 이익을 취하며, 양자강의 뒤에서 외침을 막을 수 있는 지리의 利를 얻었으나 촉한은 험한 검각이 말하듯 높다란 산맥 속에 둥지마냥 자리한 비옥한 옥토가 전부일 뿐이고, 그나마 서역 교역 길의 길목인 한중과 오장원이 촉한의 생명줄이었다.
제갈량은 인화의 利를 취하였다. 유비라는 울보가 만드는 모든 사람들, 어떤 사람이라도 감복해 화합하게 하는 감화력과 삼형제의 도원의 결의가 만드는 의협의 의리와 함께 제갈량의 지혜가 이루는 지도력이 촉한을 지탱하는 힘이었다.
'우리가 위를 공격하는 것은 정복당하지 않기 위한 방어적 군사행동이다. 공격을 함으로써 상대의 대규모 군사행동의 기회와 이동을 저지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촉한이 유일하게 삼국의 지렛대 역할을 하며 주도권을 쥔 상태에서 천하의 평화를 유지하는 것이다' 라고 제갈량은 생각했다.
가엽다, 불쌍하다고 생각했다. 당대의 사람들의 마음을 감싸 안을 만한 사상도 철학도 세력형성도 없다. 조조도 환관의 자식이란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고 손권도 지방 군벌의 틀을 탈피하지 못했다. 제갈량 또한 한왕조에 미련을 지닌 유학자로써 유민화되어 떠돌던 한제국 유신들의 지도자란 한계에 부딪혔다.
제갈량은 무모한 군사행동은 자제하고 있었다. 손권과 조조와 조비, 조예, 사마의도 마찬가지였다. 군사적 충돌이 있을수록 상호이해의 바탕 속에 이루어져야 될 전한 고조 유방이 진시황의 폭정을 무너뜨리고 달성한 하나의 중화란 생각이 증오와 미움, 반목으로 분열되어 갈 뿐이다. 이래서는 한실의 부흥은 고사하고 중원의 존립이 위태롭다. 관구검의 요동정벌 이후 태동하는, 선비와 흉노, 돌궐과 고구려의 성장이 위나라의 배후를 위협하고 있다.
그래서 제갈량은 과전을 시행했다. 농번기에는 병사들이 농사를 짓고 결혼도 하도록 했다. 교대로 병역을 담당하게 했고, 귀순하는 자나 타국인의 정착도 검증된 상태에서 허용했다.
혜명의 긴 침묵의 기다림도 끝났다. 제갈량이 붓을 들으며 군막안의 정적도 멈추었다.
“이 편지를 마대에게 주면 난민촌에 필요한 물품을 줄 것입니다. 아녀자와 아이들을 보살펴 주시고 좋은 가르침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들은 전쟁의 피해자니까요. 스님의 자비가 필요합니다.”
혜명은 말없이 합장으로 답했다.
기산, 양평관, 가맹, 한중은 촉한의 최전방이었다. 당연히 전투는 치열했고 그로인한 전쟁 미망인과 함께 고아가 속출했다. 전쟁 영웅호걸에 가려진 피해자이자 소외된 사람들이었다.
서역에서 불교를 공부한 혜명은 형주의 사마휘 소개로 제갈량을 만났다. 제갈량은 지혜롭고 현명하며 포부가 컸다. 또한 융중 주변의 주민에게 농사법과 치수법을 알려주고 그에 필요한 기구를 개발해 농민들을 도왔다.
지혜롭고 후덕한 제갈량에게 혜명스님은 호감을 가졌고, 사마휘 선생은 양양의 젊은 선비들이 새롭게 흘러 들어오는 불교에 대한 이해를 갖기 바랬다.(불교는 후에 유교에 영향을 주어 송나라시대 주자학 성립에 기여하게 된다.)
어쩌면 민초들에게 진실로 필요한 것은 누가 천하를 통일하고, 어느 군웅, 영웅, 호걸이 전략을 펼치고, 무공을 세우는 전쟁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땅과 물에 힘써 농토에서 끝임 없이 벼 이삭과 채소를 생산해 연명해가는 민초들, 그들에게 필요한 마음의 안식처를 불교가 가져다 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당시 제갈량은 남군(南郡) 양양현(襄陽縣)의 명사 방덕공(龐德公), 수경(水鏡)선생 사마휘(司馬徽), 면남(沔南)의 황승언(黃承彦)등의 가르침을 받았고, 젊은 선비로는 영주(潁州) 석광원(石廣元), 여남(汝南)의 맹공위(孟公威), 박릉(博陵) 최주평(崔州平), 영주(潁州) 서서(徐庶)등의 선비들과 친하게 지냈다. 그들에게 혜명 스님을 소개한 것이 사마휘였다.
조조가 청주에서 황건적의 잔당을 토벌하는 과정 중 황건적의 황로지학(후대의 도교 또는 노장사상)을 묵인하고 황건적을 자신의 정예병 화하여 흡수하였듯이 제갈량은 서역과 가까운 한중지역에서 활동하는 서역의 승려와 스님들의 불교포교를 묵인했다.
새로운 시대의 물결을 이룰 신흥종교의 포교를 묵인한 것이다.
제갈량은 불교의 우주관과 사후관이 지닌 세계관이 현실적인 유교의 부족한 부분을 보완해 줄 만한 새로운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예견은 수백 년 후 이루어질 주자학(성리학)의 탄생을 바라 본 것이었다.
- 다음 편에 계속 -
*저자 김주형은 전주대 무역학과를 졸업하고, ROTC 33기로 보병 소대장을 역임했다.
2000년 초반 무토(전 무카스)에서 객원 기자로 활동했으며, 소설 ‘이야기태권도’의 저자이기도 하다.
현재 서산문학 회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