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멸시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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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용상(한국법학교수회 사무총장)
인간이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거래관계가 형성되고, 그러한 거래 중에는 민사생활관계인 의식주생활관계도 있고, 상사생활관계인 기업거래관련 생활관계도 생길 수 있다. 이러한 다양한 생활관계 속에서 살다 보면 타인에 대한 청구권을 행사하지 않아 자기채권을 상실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고, 반대로 내가 상대에게 지급해야 할 부채가 일정한 기간이 지나 시효가 완성되어 상대로부터 청구를 받아도 갚지 않아도 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권리 위에 잠자는 자를 제한없이 영속적으로 보호한다는 것이 거래질서를 매우 복잡하게 할 우려가 있기 때문에 법은 일정기간동안 권리행사를 하지 않으면 권리를 잃게 하는 소멸시효제도를 규정하고 있다.
시효란 일정한 사실상태가 일정기간 계속된 경우에 그 상태가 진실된 권리관계에 합치되는가에 상관없이 그 사실상태를 존중하여 법률상 일정한 효과를 생기게 하는 법률요건이다. 시효에는 취득시효와 소멸시효가 있는데, 소멸시효는 권리자가 권리행사를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정기간동안 권리불행사의 상태가 계속된 경우에 그 권리를 소멸하게 하는 제도이다. 시효제도를 두는 이유는, 첫째, 사회질서의 안전과 유지를 위함이다. 법질서는 일정한 기간 동안 계속된 사실관계를 시효제도를 통하여 권리관계로 인정함으로써 사회질서를 안정시키고 제3자의 신뢰를 보호하려고 한다. 둘째, 입증이 곤란한 경우를 구제하기 위한 목적이다. 시효제도는 과거사실의 증명곤란성으로부터 소유자 및 채무자를 구제하는 제도이다. 셋째, 권리행사의 태만에 대한 제재의 성격을 갖는다. 오랫동안 자기의 권리를 행사하지 않은 채 방치하면 이른바 ‘권리위에 잠자는 자’가 되어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게 된다.
소멸시효가 완성되기 위해서는 권리자의 권리가 소멸시효의 완성으로 소멸될 수 있는 권리이어야 하며, 일정기간 동안 그 권리를 행사하지 않아야 한다. 권리자가 법률상 그의 권리를 행사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행사하지 않아야 하고, 권리자의 권리불행사가 소멸시효기간 동안 계속될 것이 요구된다.
민법은 소멸시효의 대상이 되는 권리를 재산권으로 한정하고, 신분권과 인격권 같은 비재산적 권리는 제외한다. 물론 재산권 중에도 소멸시효에 걸리지 않는 권리도 있음을 주의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채권은 소멸시효에 걸린다. 물권중에서 소유권은 소멸시효에 걸리지 않는다. 점유권과 유치권은 점유라는 사실상태에 의존하여 인정되는 권리이기 때문에 별도로 소멸시효의 문제가 생길 수 없다. 질권과 저당권은 피담보채권이 존속하는 한, 독립하여 소멸시효에 걸리지 않는다. 소멸시효는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때’로부터 기산되어 진행된다. 즉 권리를 행사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행사하지 않은 때로부터 소멸시효의 기간이 진행된다.
채권의 소멸시효기간을 살펴보면, 일반채권은 원칙적으로 10년이다. 주식회사 이사나 감사의 임무해태로 인한 회사의 손해배상청구권 역시 10년이며, 근로자의 근로계약상 주의의무 위반으로 인한 손해배상청구권의 소멸시효기간도 10년이다. 그러나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배상청구권의 소멸시효에 대해서는 특별규정이 있다. 한편 당사자 쌍방에 대해 모두 상행위가 되는 행위로 인한 채권뿐만 아니라 당사자 일방에 대하여만 상행위에 해당하는 행위로 인한 채권도 상사채권에 해당하여 5년의 소멸시효기간이 적용된다. 상거래로 인한 시효는 거래의 특성상 단축된 경우가 많다. 예를 들면 공중접객업자는 고객의 임치물을 반환했거나 고객이 휴대물을 가져간 이후 6개월, 운송인이나 운송주선인의 운송채권․운송물에 대한 책임, 창고업자의 임치물에 대한 책임이나 채권은 1년, 보험금액청구권이나 보험료 또는 적립금반환청구권은 2년, 보험료청구권은 1년, 공동해손으로 인한 채권이나 구상권은 1년의 시효로 소멸한다.
3년의 단기소멸시효에 걸리는 채권은, 첫째, 이자, 부양료, 급료, 사용료 기타 1년 이내의 기간으로 정한 금전 또는 물건의 지급을 목적으로 한 채권이다. 여기서 ‘1년 이내의 기간으로 정한 채권’이란 1년 이내의 ‘정기에 지급되는 채권’을 의미하는 것이지, 변제기가 1년 이내의 채권을 말하는 것이 아니므로 이자채권이라고 하더라도 1년 이내의 정기에 지급하기로 한 것이 아닌 이상 3년의 시효에 걸리는 것은 아니다. 둘째, 의사, 조산사, 간호사 및 약사의 치료, 근로 및 조제에 관한 채권이다. 채권자는 의사(치과의사, 한의사, 수의사), 조산사, 간호사 등의 의료진과 약사이다. 셋째, 도급받은 자, 기사 기타 공사의 설계 또는 감독에 종사하는 자의 공사에 관한 채권이다. 넷째, 변호사, 변리사, 공증인, 공인회계사 및 법무사에 대한 직무상 보관한 서류의 반환을 청구하는 채권 또는 그들의 직무에 관한 채권이다. 다섯째, 생산자 및 상인이 판매한 생산물 밀 상품의 대가, 수공업자 및 제조자의 업무에 관한 채권이다.
한편, 1년의 단기소멸시효기간에 걸리는 채권은, 첫째, 숙박료, 음식료, 대석료(자리대여값), 오락장의 입장료, 소비물의 대가 및 체당금(대체충당금)의 채권이다. 둘째, 의복, 침구, 장구 기타 동산의 사용료채권이다. 셋째, 노역인·연예인의 임금 및 그에 공급한 물건의 대금채권이다. 넷째, 학생 및 수업자의 교육·의식 및 유숙에 관한 교주·숙주·교사의 채권이다.
위의 5년~1년의 소멸시효기간에 걸리는 것이라도 확정판결을 받으면 그 권리의 소멸시효는 10년으로 한다. 물론 10년보다 장기의 소멸시효를 10년으로 단축한다는 의미도 아니고, 본래 소멸시효의 대상이 아닌 권리가 확정판결을 받음으로써 10년의 소멸시효에 걸린다는 뜻도 아니다. 채권 및 소유권 이외의 재산권은 20년의 소멸시효기간에 걸린다.
권리불행사의 상태를 중단케 하는 권리자 또는 의무자의 일정한 행위가 있는 경우에 이미 경과한 시효기간을 소멸하게 하고 그 때부터 다시 소멸시효의 기간을 진행하게 하는 제도로 ‘소멸시효의 중단’이 있다. 즉 어떤 사실상의 상태가 계속되던 중, 그 사실상의 상태와 상용(相容)할 수 없는 사정이 발생한 때에는 시효제도의 취지상 그 사실상의 상태를 존중할 이유를 잃게 된다고 할 것인데, 이미 진행한 시효기간의 효력을 상실하게 한다. 그 예로는 첫째, 청구를 한 때인데, 이에는 재판상 청구, 파산절차참가, 지급명령, 화해를 위한 소환, 임의출석, 최고 등이 해당된다. 둘째, 압류·가압류·가처분을 행한 때, 셋째, 승인 등을 한 때가 이에 해당한다. 시효가 중단되면 그때까지 경과한 시효기간은 소멸시효의 기간에 산입하지 않는다. 그리고 시효중단은 당사자 및 그 승계인에 있어서만 효력이 있다. 시효가 중단된 후에도 권리를 행사하지 않으면 그때부터 시효기간은 새로이 진행된다.
한편 시효를 중단시키는 것이 곤란하거나 불가능한 경우에 일정한 유예기간동안 시효진행을 멈추게 하였다가 그러한 사정이 없어진 때에 다시 나머지 기간을 진행시키는 제도로서 ‘소멸시효의 정지’가 있다. 시효정지의 사유는 첫째, 소멸시효기간만료 전 6개월 내에 무능력자의 법정대리인이 없는 때에는 그가 능력자가 되거나, 법정대리인이 취임한 때로부터 6개월 내에는 소멸시효가 완성하지 않는다. 둘째, 부부일방의 타방에 대한 권리는 혼인관계가 종료한 때로부터 6개월 내에는 소멸시효가 완성하지 않는다. 셋째, 상속재산에 속한 권리나 상속재산에 대한 권리는 상속인의 확정, 관리인의 선임 또는 파산선고가 있는 때로부터 6개월 내에는 소멸시효가 완성하지 않는다. 넷째, 천재 기타 사변으로 인하여 소멸시효를 중단할 수 없을 때에는 그 사유가 종료한 때로부터 1개월 내에는 소멸시효가 완성하지 않는다.
소멸시효가 완성되면 권리는 당연히 소멸하는 것으로 보는 견해와 소멸시효의 완성으로 권리가 당연히 소멸하지는 않고, 다만 시효의 이익을 받을 자에게 권리의 소멸을 주장할 권리가 생길 뿐이라고 하는 견해로 나누어진다. 후자가 진정한 권리자의 권리보호에 보다 충실한 해석이라고 본다. 소멸시효의 완성을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은 시효로 인하여 채무가 소멸됨으로써 직접적 이익을 받는 사람에 한정된다. 소멸시효가 완성됨으로써 권리가 소멸하는 시기는 시효기간이 만료한 때이지만, 그로 인한 권리소멸의 효과는 소급하여 그 기산일에 생긴다. 시효제도는 그 시효기간동안 계속한 사실상태를 권리상태로 끌어 올리는 것이므로 소급효를 인정하는 것은 타당하다. 소멸시효가 완성된 후에 시효완성의 이익을 당사자의 의사에 의하여 버리는 시효이익의 포기는 허용된다. 소멸시효에 관한 당사자의 법률행위에 의하여 소멸시효를 배제, 연장 또는 가중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지만, 단축 또는 경감하는 것은 허용되므로, 시효기간을 단축하거나 시효의 기산점을 앞당기거나, 법정시효중단사유의 일부만을 인정하는 것 등은 유효하다. 주된 권리(예: 원본채권)의 소멸시효가 완성하면 그 효력은 종된 권리(예: 이자채권)에 미치므로 종된 권리의 소멸시효도 완성된 것으로 간주한다.
시효에 관한 법규정을 이해하여 시민생활관계에서의 불이익을 당하지 않도록 생활법률에 관한 지식이 필요하다. 법치주의 하에서 교양인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법적 소양을 갖추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