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성년자가 한 계약의 유효성
정용상(한국법학교수회 부회장 겸 사무총장)
가정에서 아이들을 키우다 보면 아이들이 허락도 없이 멋모르고 비싼 물건을 구입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하나의 예를 들어보자. 고등학교에 입학한 자녀가 입학식장에서 만난 영어회화 학습지를 판매하는 모회사 영업사원과 1년치 학습지구입계약을 체결하였다. 며칠 후 그 부모는 집으로 배달된 학습지대금청구서를 보고 대금이 너무 비싸 깜짝 놀라 자녀에게 그 계약을 취소하라고 요구했고, 그 자녀는 영업사원에게 구입계약의 취소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그 영업사원은 이미 한 달치 교재와 테이프를 사용했기 때문에 그 계약의 취소가 불가능하다고 답변했다. 이 경우 계약의 취소는 가능할까?
우리 민법은 권리·의무의 주체로서 자연인과 법인을 두고 있다. 법률관계, 즉 권리·의무의 당사자로서의 자격(능력)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문제된다. 첫째, 권리·의무의 귀속주체가 될 수 있는 자격(권리능력), 둘째, 법률행위를 할 수 있는 실질적 기초인 정신적·주관적·구체적 인식능력(의사능력), 셋째, 사회적 거래관계를 판단할 수 있는 객관적·일반적·인식능력(행위능력)이 그것이다. 이 3가지 자격을 갖추고 있는 경우에 비로소 자연인은 법률행위를 할 수 있다. 권리능력이 없으면 애당초 권리·의무가 귀속될 수 없으며, 구체적 의사능력이 없으면 행위능력이 있는 자의 법률행위라도 그 효력이 발생하지 않는다. 행위능력이 없는 자연인은 완전한 법률행위를 할 수가 없다.
자연인은 누구나 권리능력을 가지므로, 원칙적으로 생존하는 동안 거래의 주체가 될 수 있다(태아의 법률상 지위는 별론으로 함). 이러한 권리능력이 있더라도 자연인은 법률행위를 체결하는데 필요한 정상적인 의사결정을 할 수 있는 정신능력 또는 판단능력을 가지고 있어야 하므로(의사능력), 유아·만취자와 같이 의사능력이 결여된 자(의사무능력자)가 한 법률행위의 효력은 무효이다. 의사능력을 가진 자가 유효한 법률행위를 단독으로 할 수 있는 능력을 행위능력이라고 한다.
우리 민법은 성년자에게 행위능력을 부여하고 있다. 의사능력이 없는 자의 법률행위는 무효이지만, 의사능력이 있더라도 행위능력이 없는 자(행위무능력자)의 법률행위는 취소될 수 있다. 물론 성년자라 하더라도 한정치산이나 금치산선고를 받은 때에는 행위능력이 없다.
미성년자 또는 법원으로부터 금치산 또는 한정치산선고를 받은 자의 법률행위는 의사능력이 완전하지 않은 상태에서 행하여졌다는 입증이 없어도 이를 취소할 수 있게 함으로써 행위자를 보호하고, 거래상대방에게 불측의 손해를 주지 않게 하기 위하여 행위무능력자제도를 두고 있다.
우리 현행 민법상 성년은 만 20세이나 2011년 4월 18일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된 민법일부개정안에 따르면 성년을 만 20세에서 만 19세로 낮추었고, 이 개정안은 2013년 7월 1일부터 시행된다고 부칙조항에서 정하고 있으므로 앞으로 성년은 만 19세로 봐야 할 것이다.
성년 연령의 하향은 청소년의 조숙화와 국내외입법동향에 비추어 볼 때 타당하다고 본다. 이미 공직선거법상 선거권을 만 19세 이상에게 주고 있고, 청소년보호법상 청소년은 만 19세 미만으로 정하고 있다. 외국의 경우 독일, 프랑스, 미국, 중국은 성년을 18세로 정하고 있다. 다만 일본과 대만은 20세를 성년으로 정하고 있다.
미성년자도 의사능력이 있으면 유효한 법률행위를 할 수 있으나, 부모, 친권자, 후견인 등 법정대리인의 동의가 없는 행위는 미성년자 본인 또는 법정대리인이 이를 취소할 수 있다. 그러므로 미성년자는 단독으로 유효한 법률행위를 할 수 없음이 원칙이다.
예외적으로 미성년자가 단독으로 할 수 있는 것은, 단순히 권리만을 얻거나 의무를 면하는 행위, 처분이 허락된 재산의 처분, 허락된 영업에 관한 미성년자의 행위, 다른 사람의 대리인이 되는 행위, 유언행위(만 17세 이상일 때 한 함), 법정대리인의 동의를 얻어 미성년자 스스로 근로계약을 체결할 수 있는 것 등이다.
미성년자가 법정대리인의 동의없이 법률행위(계약 등)를 한 경우, 그 법률행위는 일단은 유효하지만 그 법률효과를 원하지 않는 경우에는 이를 취소할 수 있다. 따라서 학교생활 등 법률적 불이익이 크게 우려되지 않는 계약, 즉 학용품 구입, 교통수단의 이용, 영화·공연관람 등과 같은 일상적 거래는 법정대리인의 동의가 없더라도 이를 취소하여 그 법률효과를 부정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미성년자가 법정대리인의 동의없이 계약을 체결한 경우에 미성년자 본인이나 법정대리인이 그 계약을 일방적으로 취소할 수 있는데, 다만 그 기간은 추인할 수 있는 날로부터 3년 이내, 또는 계약을 체결한 날로부터 10년 이내로 제한된다. 계약이 취소되면 그 계약은 처음부터 무효가 되므로, 미성년자는 현존이익의 한도내에서 물품을 반환하면 된다. 예를 들어 사은품으로 받은 자전거를 이미 사용했다면 현재의 상태 그대로 반환하면 되고, 책·테이프·화장품 등은 사용하던 상태 그대로 반환하면 된다.
그러나 법정대리인이 추인하면 그 계약은 유효하다. 법정대리인 또는 성년이 된 미성년자가 대금의 일부를 지급했거나 사업자에게 반대급부를 제공할 것을 요구했다면 계약을 추인한 것으로 간주된다. 즉 미성년자가 부모의 동의없이 오토바이를 구입했는데 부모가 대금의 일부를 지급했거나, 오토바이 수령시 그 계약을 취소한다는 의사표시를 하지 않았으면 그 계약은 유효하게 된다.
또한 미성년자가 거짓말 등 사기적 수단을 동원하여 사업자에게 자신을 성년이라고 믿게 하거나 법정대리인의 동의가 있는 것처럼 속였을 때에는 계약을 취소할 수 없다. 예를 들어, 변조한 가족관계증명서, 인감증명, 위조된 법정대리인 동의서 등을 제시하여 사업자를 속인 경우에는 미성년자도 법정대리인도 취소권을 행사할 수 없다. 미성년자가 부모의 동의없이 몰래 부모의 주민등록번호를 이용하여 인터넷 쇼핑 몰에서 물품을 구입한 경우에는 부모는 대금지급을 거절할 수 있다. 물론 동의가 없었다는 입증책임은 부모가 부담해야 한다.
반면에 사업자의 입장에서는 미성년자의 법정대리인이나 성년이 된 미성년자 본인에게 1개월 이상의 기간을 정해 계약을 추인할 것인지 취소할 것인지 확답을 요구할 수 있다. 정해진 기간 안에 미성년자 측의 확답이 없을 경우에는 계약에 동의(추인)한 것으로 본다. 다만 미성년자가 친족회의 동의를 얻어야 하는 경우와 같이 특별한 절차를 거쳐야 하는 경우에는 확답이 없으면 취소한 것으로 본다. 또한 사업자가 계약 당시 상대방이 미성년자임을 몰랐을 경우에는, 미성년자의 법정대리인이 추인을 해서 계약이 효력을 갖기 전이라면 계약을 철회할 수 있다. 참고로 미성년자의 법정대리인은 친권자, 후견인의 순으로 된다. 친권자는 미성년자의 부모이고 공동으로 친권을 행사해야 한다. 법정대리인의 권한으로는 동의권, 대리권 및 취소권이 있다.
위의 고등학교 입학식장에서 학습지를 구입한 사례의 경우 그 학생은 미성년자로서 법정대리인인 부모의 동의없이 학습지구입계약을 체결하였으므로 학생이나 부모가 그 계약을 취소할 수 있다. 테이프를 일부 사용하였더라도 취소시의 테이프 상태 그대로 반환하면 된다. 그러나 만일 그 학생의 부모가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대금일부를 지급했다면 계약을 유효하게 추인한 것으로 볼 수 있으므로 그 계약을 취소할 수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