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가 죽은 후에 나의 뼈를 하얼빈공원 곁에 묻어 두었다가 국권이 회복 되거든 고국으로 반장해 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또한 마땅히 우리나라의 회복을 위해 힘쓸 것이다. 너희들은 돌아가서 동포들에게 각각 모두 나라의 책임을 지고 국민된 의무를 다하여 마음을 같이하고 힘을 합하여 공로를 세우고 업을 이루도록 일러다오. 대한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을 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
사실이 처음으로 확인됐다고 춘천MBC가 21일 밝혔다. 방송에 따르면 안 의사 막냇동생 안공근의 아들인 독립운동가 안우생의 유족 20여명이 평양을 비롯한 북한 각 지역에 흩어져 살고 있었다. 이들은 작년 10월 한자리에 모여 평양 애국열사릉에 있는 안우생의 묘를 찾아 헌화하는 등 독립유공자 가족으로 북한 당국으로부터 일정 부분 혜택을 입고 있었다고 춘천MBC는 설명했다. 안 의사가 순국한 후 김구의 대외담당비서로 일한 안우생은 1948년 남북연석회의 때 안중근 의사 유해 발굴을 촉구하기 위해 김구와 함께 북한으로 갔다가 남게 됐으며 1991년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안우생의 손자 안덕준(김일성대학 수학과 박사과정)씨는 방송에서 “할아버지 안우생은 큰아버지인 안중근 열사의 뜻을 이어 한평생을 나라의 독립을 위해 바쳤다”고 말했다. 춘천MBC는 안중근 의사가 나고 자란 고향 해주는 물론 평양과 남포·신천 등에 퍼져 있는 안중근 의사의 사적지 모습을 방영할 것으로 알려졌다. 안 의사가 28세 때 독립계몽운동을 펼친 평안남도 남포시 남포공원에는 안중근기념비가 세워져 있고, 안 의사가 1906년에 남포에 세운 삼흥학교 자리에는 예술인을 많이 배출한 남흥중학교가 있었다고 춘천MBC는 전했다. 춘천MBC는 “북한은 영화 ‘안중근, 이등박문을 쏘다’의 세트장 현장을 보존하고 안 의사 기념주화와 우표도 발행하는 등 안 의사를 독립운동가로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춘천MBC는 “방송 사상 처음으로 북한에 남아 있는 안중근 의사의 발자취를 따라 제작한 다큐멘터리 ‘안중근, 분단을 넘다’를 안중근 의사 순국 100주년을 맞는 3월 26일 오후 6시 50분 전국으로 방송할 예정 이라고 말했다. |
|
.1894년: 16세에 김아려와 혼인. 김구와의 첫 만남.
. 1896년: 부친 안태훈이 천주교에 입교.
. 1897년: 19세에 천주교에 입교.
. 1898년~ 1904년: 천주교 전교 사업. 천주교대학 설립을 추진하였으나
불발.
. 1905년: 부친 안태훈 사망
. 1907년: 석탄회사 삼합을 설립하였으나,
같은해 8월 1일 대한제국의 군대가 만주로 망명했다.
. 1909년: 단지동맹 결성(동지 11명).
. 1909년 10월 26일: 거사
. 1910년 2월 14일: 일본제국 재판부는 안중근에게 사형을 선고.
.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 55분 순국.
|
1910년 3월 26일 1910년 3월 26일 오늘 조선침략의 원흉인 일본총리 이토히로부미를 암살한 살인죄로 안중근 義士께서 교수형으로 순국하니 지금부터 정확히 100년전에 일어난 일이다. 1909년 10월 26일 러시아 재무상 코프체프와 회담하기위해 만주 하얼삔 역에 도착하여 러시아헌병대 군악연주로 환영식이 거행되는 순간 안중근은 가지고 있던 육혈포(리볼버권총) 3발을 이토의 심장을 향해 쏘았는데 이로서 이토히로부미는 69세의 일기로 生을 마감하게 되었는데 여기까지는 우리가 역사시간에 배운바 있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일본의 조선침략정책의 최고 우두머리인 이토히로부미는 청일전쟁, 을사조약,러일전쟁을 주도하며 그 당시 일본의 입장에서는 최고의 국가적인 영웅이었는데 이름모를 조선의 한 청년 으로부터 저격을 당하니 100년전의 아주 큰 사건인 셈이다. 1879년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난 안중근(兒名:안응칠)은 그당시 저물어 가는 조선말기의 암울한 시기에 일제의 조선침략획책을 세계만방에 알리고자 홀몸으로 항거하여 이토오를 저격한 것이다. |
안의사 순국 100주년이라서 그런거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