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등(無等)처럼 함께 가자! 영원히!
- ROTC 15기 임관 30주년 기념 등반 -

백두대간에서 벗어난 ‘금남호남정맥’이 주화산에서 갈라져 한줄기는 북쪽으로 향하다가 계룡산을 이루고, 또 한줄기는 남하하여 호남정맥을 이룬다. 산마루들이 낮게 이어지며 나주평야를 잠시 어슬렁거리는가 싶더니, 느닷없이 몸을 곧추세운다. 바로 무등산(1,186.8m)이다.
무등산은 명칭도 각양이고 유래 또한 각색이다. 그만큼 널리 알려져 있기에 더 이상의 부연 설명은 필요치 않으리라. 하지만 이 산을 명산의 반열에 올려놓으며 두고두고 인구에 회자하는 까닭은, 지형적인 산으로서의 평가보다 무등산이 내포하고 있는 정서적 상징성과 역사성에 기인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시인 고은(高銀)은 ‘광주여 빛고을 들이여’에서 이렇게 노래했는지 모른다.
저 무등산은 안다/ 여기 태어난 자/ 여기 있는 자/ 여기 떠난 자/ 그 누구 할 것 없이 그들 모두의 아버지인 무등산을 안다/
무등산은 산세가 웅장하고 자애로워 일찍이 성산(聖山) 신산(神山)으로 불려졌다. 육당 최남선도 <심춘순례>에서 이 산을 일컬어 ‘호남의 신전’이라 했다. 무등산은 묘향산, 구월산과 더불어 신에게 제사를 지내던 우리나라 3대 진산 중의 하나이다. 그런 까닭에 가장 높은 자리에 위치한 부처님처럼 어느 것도 견줄 수가 없다는 <무유등등(無有等等)>에서 이 산의 이름이 유래한다는 설명이 가장 일반적이다.
이렇듯 무등산은 광주와 호남 사람들에겐 종교요 신앙 그 자체이다. 범접할 수 없는 경외와 존엄의 대상인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친근한 이웃처럼 서로 부대끼며 지낸다. 아예 한 몸처럼 살갑게 붙어산다. 사람과 자연이 아무 거리낌 없이 대화하고 소통하는 곳. 무등산은 광주 사람과 호남인 갈라놓고 생각할 수 없는 하나의 등식인 것이다.
가난이야 한낱 남루(襤褸)에 지나지 않는다./ 저 눈부신 햇빛 속에 갈매빛의 등성이를 드러내고 서 있는/ 여름 산(山) 같은/ 우리들의 타고난 살결, 타고난 마음씨까지야 다 가릴 수 있으랴.// 청산(靑山)이 그 무릎 아래 지란(芝蘭)을 기르듯/ 우리는 우리 새끼들을 기를 수밖에 없다. (서정주의 ‘무등을 보며’ 중에서)
2007년 4월 14일 아침. 어제까지 내리던 황사를 동반한 봄비는 거짓말처럼 걷혔다. 대신 맑게 갠 하늘에서는 봄 햇살이 한 아름 대지로 쏟아진다. 마치 광주(光州)를 일컬어 왜 ‘빛고을’이라 하는지를 증명하듯------.
찜질방을 출발하자마자 우리를 태운 전세버스는 이내 무등산을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1,000m가 훌쩍 넘는 산이면서도 이처럼 도심 깊숙이 능선자락을 드리우고 있는 것이 또한 무등산의 특징인 것이다. 버스는 원효계곡을 따라 완만한 능선길을 오른다. 이제 막 물이 오른 새순들이 아침 햇살에 보석처럼 반짝거린다.
공원관리사무소에 도착! 모두들 하차했다. 그리고 기념촬영. 울산에서 온 최해원 동기의 너스레에 모두가 박장대소한다. (이번 여정에서 최해원 동기의 활약은 몇 배의 즐거움을 더해 주었다) 산행에 앞서 간단한 체조를 마치고 우렁차게 구호한다.
<함께 간다 15기!! 앞으로 30년!!>
□ 공원관리사무소-늦재-동화사터
늦재를 오른다. 원효사 앞에 서있는 의상봉(548m)이 우리를 배웅한다. 만치초적(늦재에서 들려오는 나무꾼들의 풀피리 소리 : 晩峙草笛)을 지금에서야 듣기 어렵겠지만 동화사터를 향해 가로 질러가는 오름길은 원만하고 부드럽다. 가끔 가파른 오름길이 있어서 거친 숨을 몰아 쉬기도 하지만 곳곳에 샘터요 쉼터라서 그리 고단한 산행은 아니다.
해발 390m의 늦재삼거리. 이정표에는 서석대 5.8km, 입석대 5.3km, 장불재 4.9km라고 적혀있다. 동화사 터로 향한 길. 육산임에도 간혹 나타나는 너덜지대가 애교(?)스럽다.

동화사터(805m). 여기가 절 터였는가? 흔적과 자취를 찾기는 어렵다. 무심히 서있는 돌무덤이 우리 일행을 맞이한다. 그야말로 ‘산천의 의구한데 인걸은 간 곳 없네’이다. 중봉으로 향하는 능선길 거의 중간 지점에 <동화사터 정상>이라는 안내판이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 절의 규모를 짐작하게 한다.
하지만 사방이 활달하게 터져있어 조망은 시원하고 경쾌하다. 굽이굽이 기어오르던 늦재는 숲에 가려 보이질 않지만 낙타봉과 평두봉이 북서쪽으로 발길을 재촉하고 있고, 비로소 무등산 정상에 해당하는 천왕봉이 손에 닿을 듯 펼쳐져 있다.

□ 중봉-무등평전-서석대
중봉으로 향하는 능선(사양능선)은 소의 잔등처럼 원만하고 평평했다. 우측으로 계곡 입구에 도착 지점인 증심사가 내려다 보이고, 멀리 광주 시내 아파트 단지가 마치 세워놓은 성냥갑처럼 가지런하다. 맑은 날에는 호남의 넓은 평원을 훤하게 조망할 수 있다는데, 황사 때문인지 시야가 아주 멀지 않음이 조금은 아쉽다.
무등산은 전남지역에 흐르는 물줄기의 발원지이기도 하다. 보성강, 섬진강, 영산강의 모체 또한 이곳이다. 그래서 그런지 능선에서도 물이 솟는 산이다.
시인 김지하의 ‘타는 목마름으로’ 라는 절규로 대표되는 시절, 무등산은 도처에 솟구치는 약수물로 시대의 갈증을 풀어주고 치유한 정점에 솟아 있었다는 표현도 이런 특징에서 기인함이리라. 더구나 무등산은 동학혁명 이후 우리의 근현대사의 격동기에서도 항상 그 중심에 위치하고 있었다. 침묵보다는 홀연 선봉이 되고 기치를 드높인 성지였다. 그런 의미에서 무등산은 그 자체가 매우 정치적이라는 사람도 있고, 도처에 강력한 영기(靈氣)가 서려 있다고 신성시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이 산을 ‘무덤산’ ‘무정산’이라는 별칭으로 부르는 자체가 무등산에 대한 모독이자 호남사람들에 대한 결례가 아닐지?
쉬엄쉬엄 어렵지 않게 중봉(860m)에 당도했다. 중봉에서 우리를 맞이하고 있는 것은 어느 방송국에서 설치한 거대한 중계탑이었다. 봉마다 꽂혀있는 철탑 안테나는 무등산의 대표적인 흉물(?)이다. 인공과 자연이 조화롭게 어울리기가 애당초 어렵겠지만, 난개발도 이 정도면 너무 지나쳐 보인다.
그럼에도 중봉에서 바라보는 천왕봉과 서석대 능선은 가히 장관이었다. 중봉과 정상부 사이에 움푹 파인 넓은 안부(鞍部)가 바로 무등평전. 가을엔 억새와 갈대가 장관이란다. 무등평전은 예전에 군 주둔지였는데 철수한 후 생태계 복원 중이라니 그나마 반갑다.
정상으로 향하는 길은 제법 가풀막이다. 하지만 숨이 차오를 만하면 능선 마루 평탄한 길로 이어주는 배려는 무등산이 단연 압권이다. 1000m가 넘는 산인데도 마치 뒷동산을 오르듯 정겨움을 안겨준다. 과연 무등산답다.
무등산의 다른 이름이 서석산(瑞石山)일 정도로 서석대는 이 산의 대표적 상징이다. 조선시대 고경명은 무등산 기행문에서 서석대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낭떠러지의 서쪽에 참빗살처럼 서 있는 돌무더기는 높이가 모두 백 척이 넘게 보이는데 이것이 바로 서석대이다. <유서석록(遊瑞石錄)>중에서
지질학적으로는 이런 바위 형태를 주상절리(柱狀節理)라고 하는데, 제주도의 중문이나 해금강의 총석정이 대표적인 경우이다. 하지만 서석대의 바위기둥은 바닷가가 아닌 산꼭대기에 치솟아있는 점이 독특하다고 하겠다. 노산 이은상씨가 <무등산기행>에서,
해금강을 바다의 서석산이라 한다면, 서석산은 육지의 해금강이다.
라고 표현한 까닭도 그러한 이유리라.

저녁 노을이 바위에 비추면 마치 수정처럼 빛난다 하여 <수정병풍>이라는 서석대. 우화등선(羽化登仙 / 신선이 되어 하늘로 날아 오르다)의 경지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사방 거침없는 조망이 장쾌하다. 서석대에 오른 육당 최남선이, ‘터마저 하느님 나라, 고개 절로 숙어라’ 라고 했으니 더 이상 무슨 표현이 필요하랴!
바로 눈앞에 무등산 정상이 보인다. 무등산 정상은 천왕봉․지왕봉(비로봉)․인왕봉(반야봉) 이렇게 삼봉으로 형성되어 있는데, 정상을 이루고 있는 세 봉우리의 이름이 우주를 형성하는 기본인 3재(三才/ 天 地 人)를 사용한 것도 예사롭지 않아 보인다. 다만 군사시설 보호 때문에 출입을 할 수 없도록 울타리 안에 우두커니 앉아 있는 모습이 옥에 티였고 안쓰럽게 여겨진다.
솟구쳐 천왕봉을 이루어 놓고 바로 아래로 내려와 바위 기둥으로 서석대와 입석대를 빚어 놓은 호남정맥은 저 아래 장불재에서 잠시 숨을 돌리고는 남쪽 광양만을 향해 내닫기 시작한다. 백마능선의 평평한 잔등을 따라 가니 멀리 안양산(853m)이 시야에 들어온다.
광활한 경치를 구경하느라 너무 시간을 지체했는가? 서둘러 기념 촬영을 마치고, 아쉽지만 입석대를 향해 하산 길을 재촉할 수밖에 없었다. 서석대와 입석대는 거의 한 몸이 듯 나란히 위치해 있었다.

□ 입석대-장불재-중머리재
입석대는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제천단 구실을 했다고 하고, 고경명의 <유서석록>에 의하면 바위 사이에 ‘새가 날개를 펴 듯’한 암자가 있었다는데 흔적을 찾을 수는 없었다. 내가 보기엔 서석대보다 입석대가 더 웅대하고 장관이다.
괜히 구차스러운 표현으로 입석대의 진면목을 어질러놓지 말기로 하자. 대신 고경명의 문장을 빌어 입석대를 감상하는 편이 더 나을 것 같아 전문을 인용하기로 한다.
암자 뒤에는 괴석이 쫑긋쫑긋 죽 늘어서 있어서 마치 진을 친 병사의 깃발이나 창검과도 같고, 봄에 죽순이 다투어 머리를 내미는 듯도 하며, 그 희고 곱기가 연꽃이 처음 필 때와도 같다. 멀리서 바라보면 벼슬 높은 분이 관을 쓰고 긴 홀(笏)을 들고 공손히 읍하는 모습 같기도 하다. 가까이 가서 보면 철옹성과도 같은 튼튼한 요새다. 투구 철갑으로 무장한 듯한 그 가운데 특히 하나가 아무런 의지 없이 홀로 솟아 있으니 이것은 마치 세속을 떠난 선비의 초연한 모습 같기도 하다.
더욱이 알 수 없는 것은 네 모퉁이를 반듯하게 깎고 갈아 층층이 쌓아 올린 품이 마치 석수장이가 먹줄을 튕겨 다듬어서 포개놓은 듯한 모양이다.
천지개벽의 창세기에 돌이 엉켜 우연히 이렇게도 괴상하게 만들어졌다고나 할까. 신공귀장(神工鬼匠)이 조화를 부려 속임수를 다한 것일까. 누가 구워냈으며, 누가 지어부어 만들었는지, 또 누가 갈고 누가 잘라냈단 말인가.
<유서석록(遊瑞石錄)>중에서

장불재로 향한다. 장불재로 내려오는 길목에 주목 군락을 인공으로 조성하고 있었는데, 이곳이 기후나 풍토가 적합한지 궁금했다. 길옆으로 산작약과 철쭉이 군락을 이루고 있었지만 꽃을 보려면 좀 더 기다려야 할 듯하다. 장불재도 무등산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안부(鞍部/ 움푹 꺼진 평탄지)였다. 화순과 광주를 이어주는 고갯길이기도 했지만 해발은 990m로서 만만치는 않아 보인다. 이곳은 의병장 김덕령 장군이 병사들을 훈련시킨 장소로도 유명하다.
30년 전 상무대에서 <동복 유격장>으로 갈 때, 무등산을 넘어 갔었는데-----. 방향상으로는 군장을 메고 여기 장불재를 통과 했을 것같다. 벌써 30년 전, 기억은 희미하지만 내 젊은 청춘 시절에 발걸음마다 땀방울을 찍으며 지나갔을 언덕길에 걸으니 온 몸에 전율이 휘감아 돈다.
약관의 나이에 행군을 하던 길로, 이제는 희끗희끗한 머리의 중씰한 장년이 되어 걷는다. 산천이야 변함없으랴만 한 세대를 훌쩍 넘은 세월을 생각하니 무상하기 짝이 없다. 언젠가 학군 47기인 우리 아들 재용이도 이 길을 통과하겠지. 생각하니 더더욱 감회가 새로워진다. 길옆에 아무렇게나 주저앉아 수첩을 펼쳐 든다.
그 날도 오늘처럼 푸르른 하늘이었는지
기억에 없다.
비같은 땀을 쏟으며 장불재를 넘을 때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기억에 없다.
<서석>과 <입석>을 올려 볼 겨를도 없이
언덕으로 불어오는 한줌의 바람과
잠시 숨을 몰아 쉴 여유가
그저 고마웠겠지.
저 아래 중머리재 벗겨진 능선이
올려다보며 하얗게 웃는다.
웃음소리 입석(立石)에 부딪쳐서
보석처럼 흩어진다.
계곡과 능선으로 달려 내려가
봄꽃이 되어 흐드러진다. <拙作 / ‘장불재에 서서’>
장불재에서 동쪽으로 뻗은 능선이 규봉암으로 가는 길이다. ‘바위폭이 넓고 크며, 형상이 진기한 것이 입석보다 낫다’고 하는데 확인할 길이 없어 아쉽다. 다만 고려말 문장가인 김극기(金克己,1148~1209)가 규봉의 진면목을 극찬한 대목으로 짐작할 수밖에.
바윗돌은 비단을 마름질하여 장식하였고, 봉우리는 백옥을 다듬어 이루었네
(石形裁錦出峯勢圭宬)
장불재에서 용추삼거리를 거쳐 중머리재로 내려선다. 올라가고 내려가는 길목에 등산객들이 붐빈다. 호젓한 산행은 더 이상 기대하기가 어려울 것같다.

스님의 머리처럼 벗겨져 반들 반들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중머리재’. 임금의 옥쇄를 닮았다는 새인봉(608.2m)까지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중머리재에는 광주․전남지역 동기생들과 가족들이 우리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초면인데도 마치 이웃을 만난 듯 정겹다. 같은 부대에서 헤어져 30년 만에 만난 전우도 있다. 친구의 예전 모습은 희미하지만, 이젠 머리숱도 성글고 그나마 남은 머리칼마저 듬성듬성 서리가 내린 동료를 힘차게 얼싸안는다. 모진 세파를 굳건히 헤쳐와 중년의 나이로 내 앞에 의연히 선 동기생이 그저 반갑고 고마울 뿐이다.

시공을 초월한 동기애. 중머리재 넓은 평원이 화기애애한 웃음과 담소로 채워진다. 이 지역 동기들이 힘겹게 지고 올라온 술과 안주가 꿀맛인 것은 단순한 시장기 때문만은 아니리라. 우린 잠시 나이를 잊었다. 예전 이십대였다. 쏟아지는 봄햇살이 눈부시다.
장불재나 중머리재에서 느낀 특이한 점은 어린 학생들이 무척 많이 눈에 뜨인다는 것이었다. 선생님과 함께 소풍 온 학생 무리들. 친구와 함께 손잡고, 또는 부모를 따라 무등산을 오르는 아이들. 어려서부터 마음과 몸으로 무등의 모습을 새기고, 무등의 정신을 담으며 성장한다는 증거이다.
무등산은 그 존재 자체가 광주와 호남의 정신을 이어가고 학습화하며 사회화하는 거대한 배움터요 산실이 아닐까. 그렇다면 그것이 편협된 지역주의를 탈피하여, 가장 한국적인 정서이면서 모두가 향유하는 보편적 가치로 승화되기를 소망해 본다. 왜냐? 그것이 진정한 무등(無等)의 참의미로서 온누리에 발현되는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 하산길-증심사
반가운 만남의 시간이 너무 길었던가? 새인봉 답사는 다음 기회로 미루고 하산을 서둘렀다. 한참을 내려오는데 길 한복판을 거대한 아름드리가 가로 막아 선다. ‘당산나무’이다. 수령이 700년을 넘었고 허리 둘레 만도 5m가 넘는 고목인데도 기세는 푸르고 정정해 보인다. 당산목 아래 평상에서 잠시 다리를 펴고 쉬었다. 다시 길을 재촉하기 위해 일어서는데 이준구라는 사람이 최근에 지었다는 <당산나무> 라는 글 구절이 눈길에 든다. 운율이 단정한 것을 보니 시조(時調)의 율격이다. 아무렇게나 흰 페인트로 휘 갈려 놓은 것이 더 정겨워 보인다.
청자 빛 하늘 바라 저 풍상 겪었거니 / 난꽃이 지는 소릴 귀담아 들었으리 /
드높은 인고의 가지 꿈틀거리는 청룡(靑龍)이여. //
흰구름 머리이고 저 마을 지켰거니 / 사향노루 태어남도 눈여겨 보았으리 /
백제의 파리한 잎새 황학(黃鶴)되어 우는구나 // (이준구, 1993년)
한참을 내려오다 머리를 드니 계곡 오른쪽으로는 아까 지나온 중봉 능선길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다. 좌측으로는 임금의 옥새를 닮았다고 이름 지어진 새인봉(608.2m)이 솟아 있다. 천년 고찰 증심사는 그 계곡 사이에 위치하고 있는 것이다.
증심사 계곡엔 이미 봄꽃이 지천이다. 흐드러진 산벚꽃이 눈부시게 빛나고, 새부리만큼 자란 연두빛 새순이 어우러져 가히 별유천지비인간(別有天地非人間)의 경지를 연출하고 있었다.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 하자’는 미당 서정주의 작품 구절이 절로 흥얼거려진다.

마침 점심시간과 겹쳐 증심사 주변 음식점은 가히 장터를 방불케 한다.
30년 전 상무대에서 훈련 받을 때, 어머니가 광주로 면회를 왔었다. 몇몇 친구(김유영, 유광택, 허장호)와 여기 증심사에 와서 점심을 먹었다. 집에서 손수 만들어 온 그 많은 양의 음식을 허겁지겁 단숨에 먹어치우는 모습이 못내 마음에 걸렸는지, 어머니는 그 먼 춘천으로 향하면서 눈이 퉁퉁 붓도록 우셨단다. 그런 추억이 서린 곳이기도 하다.
‘마음을 증험하고 맑은 마음을 연다’는 의미를 지닌 증심사(證心寺). 신라 법흥왕 때 세워졌다면 어언 1,500년이나 지난 고찰인 셈이다. 대웅전의 문살창 문양이 곱고, 대웅전의 철조비로자나불좌상(보물 제131호)과 삼층석탑(지방유형 제1호)이 유명한 절이다.
이곳에 들린 고경명이 일행과 밤늦도록 담소를 나누다 자리에 들어 잠을 청하는데 들었다는 <천둥같은 노승의 코고는 소리>를 상상해 보지만, 주말 관광객들이 붐비는 속에서 그런 호젓함과 느긋함은 기대할 수는 없었다. 일행을 놓칠까봐 찬찬히 둘러보지 못하여 아쉬웠지만 후일을 기약하며 발걸음을 돌렸다.
예약된 점심 식사 자리. 더 많은 광주․전남지구 동기생들이 우리 일행을 맞아 주었다. 증심사를 둘러 온 탓에 도착이 늦어 겨우 구석진 자리를 잡았다. 정재화, 정해웅 동기와 막걸리 몇 잔을 주고받으니 금방 취기가 오른다.

세상에 먹는 즐거움만큼 큰 기쁨이 있으랴. 게다가 산행 후에, 더구나 30년 만에 만난 동기생들과의 자리인데-----. 투박하게 썰어놓은 돼지 목살과 겉절인 김치. 맛깔스러움을 더해주는 남도 음식의 정취도 오늘만큼은 동기생들의 만남과 반가움을 누를 수는 없을 듯싶다. 다음 행선지인 <동복유격장> 도착 시간이 자꾸 지체된다고 정재화 동기가 연신 그 쪽과 전화 통화를 주고받지만, 그 애타는 마음을 누가 헤아려 주리. 앞에, 옆에 모처럼 만난 동기생들과의 이야기를 나누느라 모두가 정신이 없다.
오늘의 무등 산행은 끝났다. ‘오랜 세월의 영욕 속에서 광주 시민들의 문화적 고향이자 정신적 지주가 되어 광주 시민들과 삶의 고락을 같이 하는 살아 있는 산’을 답사한 의미만으로도 만족감이 크다.
하지만 무등산은 영원히 단순한 산이 아니기에 감회는 각별하고 느낌은 새롭다. 임관 30주년 기념 등반!!! 무등(無等)의 정신을 동기 상호간에 나누고 확인하는 귀한 자리였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ROTC 장교 출신으로서의 명예와 긍지. 그 드높은 자긍심에 누가 감히 견주랴. 그래서 무유등등(無有等等)이다. 또한 동기끼리는 누구도 잘남과 못남을 따지지 않고 공평하다. 부족하면 대신 채워주고 보태줌도 무등(無等)의 정신이다. <함께 간다 15기!! 앞으로 30년!!>이라는 구호가 진심으로 가슴에서 우러나와 쩌렁쩌렁한 울림장이 되어 3,452명 동기생을 한 몸으로 묶어줌도 바로 무등(無等)의 사상과 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