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

감동글

장마

현중재 2 107
비를 잔뜩 머금은 먹구름이 그 치렁치렁한 자락을 묵직하게 늘어뜨릴 무렵이면 으레 미친년 하나가 나타나 온 마을을 한바탕씩 휘젓고 다니곤 하였다.
이와 때를 맞추어 논두렁이나 고샅길에서는 수많은 하루살이들이 마치 커다란 공처럼 까맣게 떼 뭉쳐 우리들 키 높이로 빙글빙글 어지러이 맴돌면서 멀리서 들리는 휘파람 같은 소리를 지르곤 하였다.
입을 열고 있으면 하루살이들이 입안으로 톡톡 날아들고......
(윤흥길의 '무지개는 언제 뜨는가'중에서
 
지난달 초 친구 밭에 고구마를 심어놓고 달포가 지나 쉬는 날 고구마밭을 찾았다. 심기전에도 심은후에도 물을 주지 못했고 마른 장마에 몇 포기나 제대로 뿌리를 내렸는지 조바심으로 지내다, 늦은 장마비에 이제 제법 고구마밭의 모양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감사한 마음으로 장대같은 장맛비를 맞으며 풀을 뽑아주었다. 허나 그 이면에는 많은 양의 물에 밭이 훼손이 되면 어쩌나 하는 걱정도 내 마음에 같이 존재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장마철의 풍경들,
언젠가 하루살이의 군무비행을 묘사한 위를 글을 보았을 때 몸에 찌릿한 전율이 지났던 것 같다. 지금은 사라져간 아득한 풍경처럼, 그러나 손으로 잡혀질 것 같은 기억속에서 한동안 멍하게 서 있어야 했던 기억.
철이라는 한 다발의 묶음처럼 계절이 변화하는 이 땅에서 과연 장마가 가지는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단지 한 달쯤의 일정한 기간 동안 비오는 날이 많다는 것으로 정의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이 다는 아니었다.
계절의 순환 속에서 장마는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라는, 자연이 펼치는 장엄한 의식이었고 또한 축복이었으며 재앙이기도 했다.
축복이었다는 다소 생뚱스런 의미부여는 가뭄과 관련된 것이었다.
 

윤흥길의 소설 <장마>에서도 국군아들을 기다리는 외할머니와 빨치산 아들을 기다리는 친할머니가 한 집안에 공존하고 있었다.
극단의 두 갈래 길을 떠난 소년의 외삼촌과 삼촌은 결국 외할머니와 할머니의 가슴에 대못을 박고, 그 가슴에서 뿜어진 선혈같은 것으로 결코 만날 수 없는 두 갈래 길처럼 분열을 가져야했지만 화해를 나누면서 장마가 끝나가고 그 이야기도 끝이 난다.
 
때로는 장마같은 현실로 젖은 옷을 입은 것처럼 눅눅한 삶의 시간들이 멈칫거리며 다가오기도 한다. 하지만 '이 또한 지나가리라'처럼 극복되어야 하는, 끝이 있을 것이라는 필연성을 갈구한다.
어쩌면 우리에게 다가오는 장마같은 현실은 그 자체로 인식되는 것이 아닌 그 현실이 극복되는 과정, 혹은 극복된 후에 예견되는 미래의 측면에서 가치가 판단되는 것이 아니었던가를 생각한다.
 

지금의 장마가 잠시나마 숨을 턱턱 가둘만큼의 무더운 열기를 식혀준다는 위안이나 감흥보다, 그 눈부신 햇살을 기다리거나 혹은 무더운 열기를 두려워하고 있는 게 사실인 것처럼. 장마도 일정한 기간이 지나면 끝날 것이라는 기대나 경험적 예견이 없다면, 절망처럼 그 얼마나 지루한 기간이겠는가.
 

문제를 풀어가야 할 스스로 똑똑하다고 나선 사람들이 언제나 문제를 만들고 인간과 금수의 한계와 구분은 어디까지인가의 회의는 위기감으로 휘청거리게도 한다.
 
눅눅하고 구적거리는 이 장마가 머지않아 끝날 것이듯이, 장마같은 현실이 있다면 그렇게 끝나가기도 하리라. 하여튼 장마가 끝나길 기다리는 마음으로 내일을 기다려보자.
 

가끔은 '많은 하루살이들이 마치 커다란 공처럼 까맣게 떼 뭉쳐 우리들 키 높이로 빙글빙글 어지러이 맴돌면서 멀리서 들리는 휘파람 같은 소리를 지르곤 하였다'는 글에서도 전율을 느끼듯이 오래된 책을 꺼내 읽기도 하며, 장마가 끝나길 기다리는 마음으로, 또 다를 내일을 기다려보자.
 

'잘 될 것이다'라는 대책 없는 낙관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필수불가결한 덕목임을 새기면서 말이다. 
 
우보

Comments

오랜만에 멋진 글을 봅니다.
꾸질한 장마철 주말에 책상 앞에 앉아 몇 줄 안되는 문화기행 경험과 사료를 정리하는데도 힘이 드네요.
늘 건강 보전 하시길 빕니다.
임우순
금년에는 오랜장마로 힘들었는데, 아랫지방은 날이 가물어서 농사에 지장이있는 모양인데, 오랫만에 좋은 글 즐감했습니다,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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