檜 巖 寺 址 절터를 보고..
나는 이번 주 3일간 양주시 회암동에 있는 회암사지 절터에서 풀깎기와 잔디 입히기 작업을 하였다.
말로만 듣던 회암사지 절터를 보면서 원래 모습은 간 데 없고 그 잔재만 남아 있는
옛 시절의 영화의 허실을 보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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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암사는 고려 말 충숙왕때 인도 승려 지공에 의해 창건되고 고려 마지막 왕인 우왕 때 나옹에 의해
중건되었다고 한다.
회암사는 그 당시 고려 승려 3000명이 기거하였다는 고려 최대의 사찰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회암사가 유명한 것은 조선 태조의 정신적 지주였던 무학대사가 주지로 있었던 곳이고
세종의 형인 효령대군이 이곳에서 수도를 하였다고 한다.
또한 왕위를 태종에게 넘긴 이성계가 기거를 하였던 곳이다.
대부분의 사찰은 산세(山勢)의 형편에 맞추어 비뚤비뚤 가람들이 배치되어 있지만,
회암사는 그렇치 않다. 일직선으로... 계획된 신도시같은 가람배치이다.
궁궐도 경복궁을 제외하고는 이런 규모가 없다고 한다.
이것은 태조 이성계가 태종에게 왕위를 물려주면서 “내가 지낼 작은 궁궐을 하나 지어라“ 하면서
회암사에서 여생을 보낼 것을 말한다.
아마도 이런 것이 계기가 되어 절의 모습이 왕궁의 모습과 비슷하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그러던 회암사가 쇠퇴의 길을 걸은 것은 명종때 섭정하던 문정왕후가 신임하던 보우(普雨)가
이곳을 중심으로 불교중흥책을 펴, 회암사는 전국 제일의 수선도장(修禪道場)이 되었다.
그 후 문정왕후가 죽고 조선은 다시 억불정책으로 선회하자,
명종 20년(1565) 보우는 잡혀가 피살되고, 절은 불태워졌다.
이것은 보우가 승려로서 정치에 노골적으로 관여하면서 그 당시 유학자들의 원성이 커지면서
무정황후 사 후 유생들에 의해 불에 태워졌다고 전해진다.
절이 불탔다는 기록도 있지만, 출토되는 불상들 목이 모두 잘린 점, 그릇들이 한군데 모여 부서진 점 등은
곧 자연마모나 훼손이 아니라 인위적으로 파괴된 흔적이 분명한 것으로 보아 불이 자연발화나 실화(失火)가
아니라 방화(放火)란 점은 확실하다.
정료대(庭燎帶)....상석 위에 통을 놓고 송진으로 불을 밝히던 조명대이다. 잠깐 보아도 십여개의 정료대가
여기저기 산재하고 있다.
누구의 부도(浮屠)인지 모른다. 부도는 승려들의 유해나 사리를 보관하는 탑으로 그 시대의 조각형태를
알 수 있는 예술적 가치가 있는 탑이다.
이 곳 회암사에는 나옹, 무학, 보우 대사의 부도탑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이 절 맨 뒤 오른쪽에 부도탑이 있고 그 뒤쪽에 물을 기는데 썼을 우물이 하나 있고 맷돌 등이 산재해
있는 것으로 보아 어느 정도의 사람들이 숙식을 했는지를 짐작케 한다.
그리고 우물 뒤에는 엣날 사람들이 올라갔을 법한 큰 돌들이 능선에 위치해 있었다.
그 능선에는 산에서 보기 힘든 조선송인 육송이 많이 산재해 있었다
맨 앞의 돌에는 무엇인가 불상의 얼굴을 새겼을 법한 흔적이 남아 있었다.
나는 잠시 일손을 놓고 능선쪽으로 다가가 돌 위에 앉아 과거 사람들의 생각에 잠겨 보았다.
인생을 살다보니 인생이라는 것이 생각보다 복잡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이 든다.
그리고 이러한 인생에서 나는 아주 작은 일부분이고....
그 동안 집착해 왔던 많은 욕심들과 경쟁심, 성취욕, 방황 등이
후에 한낮 쓸데없는 휴지 조각만도 못한 것으로 돌변할 줄 알면서도 나는 지금 존재하고 있다.
나는 내가 말한 것, 행동하는 것, 등에 휩싸여서 싸우고, 고민하고 있다.
인생은 정말 짧기에 어떻게든 나는 이 짧은 인생을 더 이상 낭비하면서 살았다가는
정말로 후회스러운 인생으로 나를 뒤돌아보겠다는 생각을 한다.
지금도 잘 살아왔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는다.
그래서인지 나는 지금도 내가 해야 할 일을 찾고 있는 줄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지금 이 땡볕에 몸을 담그고 수도를 하는지 모르지....
그 해답을 찾는다면,
후에 누군가에게(특히 나의 자식들) 도움이 될 지도 모르는 희망의 소리를 들려 줄 것이다.
牛 步가....


감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