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류화개(水流花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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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류화개(水流花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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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류화개(水流花開), 물이 흐르고 꽃이 피누나

누가 날더러 네가 가장 좋아하는 말, 단지 그 말을 듣고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즐거워지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거침없이 수류화개(水流花開)라고 말하리라. 고요적적한 가운데 물이 흐르고 꽃이 핀다. 이 얼마나 그윽하고 조용히 웃음 짓게 하는 풍경인가. 이 상태야말로 이 세상에서 보고 느낄 수 있는 것 가운데 가장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모습이 아닐까. 하길래 나는 이 말을 들으면 이 세상이 그래도 아름답고 살맛이 나는 곳이라는 생각이 들고, 이어 덩달아 조금은 행복해지는 것이다.

흐르는 물처럼, 피는 꽃처럼

이 말 속에는 ‘세상이 비바람으로 난세가 되거나 인적이 없는 적막한 곳에 격세되어도, 인생은 흐르는 물처럼 맑고 깨끗하며 피는 꽃처럼 낙천(樂天)하고 결실하여야 한다는 멋진 인생철학’이 담겨있다며, 자신의 좌우명으로 삼은 사람도 있다. 수류화개라는 그 고요하고, 아름답고, 평화로운 상태를 연상하는 것만으로도 입에는 조용히 웃음이 번지고 안으로는 무엇인가 충만감을 느끼게 된다.

본시 이 말은 중국 송나라때 시인 황산곡(黃山谷)의 시(詩) ‘만리장천 운기우래 공산무인 수류화개(萬里長天 雲起雨來空山無人 水流花開 : 구만리 푸른 하늘에 구름일고 비가 오도다. 빈산엔 사람조차 없는데 물이 흐르고 꽃이 핀다.)’에서 비롯된 것이거니와, 나는 언젠가 호생관 최북(崔北)의 초옥산수에 이 구절이 화제로 쓰여져 있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일찍이 추사가 선다일여(禪茶一如)를 강설하는 초의선사의 차를 선물로 받고, 써 보낸 시에도 이 말이 나온다. ‘정좌처다반향초 묘용시수류화개(靜坐處茶半香初 妙用時水流花開: 고요히 앉은 자리엔 차가 절반이나 줄어도 향기는 여전하고, 신묘한 작용이 있을 땐 물이 흐르고 꽃이 피어나누나.)’ 추사의 이 시는 너무 어려워 그 오묘한 뜻을 감히 헤아린다고 말하기 어렵다. 그렇지만 나는 이 수류화개의 경지가 천지인(天地人), 곧 하늘과 땅, 그리고 사람이 완전히 합일된 어떤 상태를 말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풍류(風流)의 가장 높은 경지가 바로 그것이요, 예술의 가장 깊은 진경이 그런 것이 아닐까 가늠하는 것이다. 그래서 얼마 전 학고재(學古齋)에서 있었던 문봉선의 매란국죽전에 가서는 방명록에 수류화개라는 축서를 적어놓고 왔다.

우리 전통국악, 특히 판소리가 궁극적으로 추구하고 지향하는 것이 곧 천지인이 하나로 합일되는 수류화개의 경지라고 나는 믿고 있다. 어떻게 보면 판소리는 그 자체가 하늘과 땅과 사람이 하나 되는 소리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혼자 소리하면서도 하늘과 땅과 사람이 하나 되는 과정, 혼자 있으면서도 모두 함께 있고, 함께 있으면서도 홀로 있는 상태, 그것이 곧 판소리의 경지라고 생각되는 것이다. 음치인 내가 판소리라면 괜히 신나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포항에서 빛의 축제, 광양에서 남도소리축제

지난 3월 말에 인연이 닿아 포스코가 광양에서 벌인 남도국악난장엘 다녀왔다. 포스코는 매년 포항에서는 세계적인 빛의 축제(불꽃놀이)를, 광양에서는 이번에 처음으로 남도소리축제를 열었다. 기업과 지역이 서로가 서로에게 꽃이 되는 모양은 보기에도 좋다. 포스코와 광양시민 사이에는 마지못해 함께 사는 상생관계를 훨씬 뛰어넘는, 네가 있어 내가 더욱 더 잘되고, 내가 있어 네가 더욱 보람 있고 빛나는 활생(活生)의 관계로 나아가고 있었다.

그날 광양에서는 오후 내내 국악공연이 이루어졌다. 옥내 공연장에서는 수준 높은 명창들의 사인사색(四人四色)소리가 울려 퍼지고, 상설무대에서는 청중이 함께 어우러지는 판소리가 흥겨웠다. 그날 저녁 운동장의 첨단무대에서 펼쳐진 장엄한 본 공연에는 광양전체인구의 7분의 1이라는 2만 여명의 시민이 남도소리에 흠뻑 젖었다. 그 소리는 백운산 너머로도, 저 넓은 남해바다로도 퍼져나갔다. 때맞추어 반도의 산하에는 매화와 동백, 그리고 산수유와 벚꽃이 시차를 두고 피어나고 있었다. 한마디로 수류화개란 이런 것이로구나 그 진면목을 만끽할 수 있었다.

빛은 머릿속에 남고, 소리는 가슴속에 남는 것. 포스코가 포항과 광양, 빛과 소리, 냉철한 머리와 뜨거운 가슴을 양축으로 하여 문화와 예술을 안고 세계로, 미래로 뻗어나가는 모습은 참으로 부럽고 장하다. 남도는 물론 한반도에, 더 나아가서는 세계와 온 누리에 수류화개하는 한민족의 소리가 연년세세 더 크게 퍼져나가기를 기대해 마지않는다. 물이여 흐르고 꽃이여 피어나라. 수류화개.

 

글쓴이 / 김정남
· 언론인
· 前 평화신문 편집국장
· 前 민주일보 논설위원
· 前 대통령비서실 교문사회수석비서관
· 저서 : <진실, 광장에 서다- 민주화운동 30년의 역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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