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시절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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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그 시절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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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 그 시절                 

                                           77-00598   김영제 (金永濟)

Prologue

 

우리가 군에서 제대한지 어언 40년이 지나갔다. 

더 늙어서 나의 기억이 더 희미하여지기 전에 나의 군대생활에 관한 기억들을 정리하고 추억들을 기록하여 동기들과 공유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이 글을 쓴다. 

우리들은 한 공간, 같은 시간 안에서 같은 경험을 하고 난 후에도 서로의 기억들은 자신만의 감정과 생각에 따라 왜곡되어 서로 다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나에게 실제로 일어났던 일들을 내가 기억하는 한 사실대로 정확하고 공정하게 기록하려 한다. 당시에 내가 겪었던 일들은 어렵고 힘들었던 것 일수록 나의 머리 속에 깊은 인상을 남겨 더 또렷이 기억된다고 생각되지만 때로는 그 일들이 아름답게 채색되거나 책갈피 속의 압화처럼 눌려지고 변형되어 생생했던 사건들이 빛이 바래 퇴색되고 미화되는 것도 사실일 것이다. 가능한 한 그런 일이 없기를 바래 본다. 


 때로는 나에 관한 모든 일들을 지나칠 정도로 솔직하게 털어놓으면서 벌거벗은 느낌이랄까, 부끄러운 마음이 들기도 하였으나 한 평생을 떳떳하게 열심히 살아왔다고 말할 수 있는 이 나이에 뭐 감출 것도 없겠다 하는 생각이 들어 모든 것을 다 쏟아 놓는다. 본 기록에서 친구들의 실명을 거론하는 것이 실례가 되거나 그들에게 부담이 되지 않기를 바라며 이는 결코 그들의 명예를 훼손할 목적이 아니고 오직 일어났던 모든 사실을 그대로 솔직하게 기술하고 기록에 객관성을 유지하고자 함이니 다른 오해는 없기 바란다. 


내가 서술한 내용이 자신이 기억하는 사실과 다르다고 동기들의 항의가 빗발치면 오히려 감사하겠다. 눈을 감고 앉아 돌이켜 보건대, 내 생애에서 가장 아름답게 빛났고 찬란했던 20대 초반의 추억들을 까마득히 먼 기억의 지평선 위에 꺼집어내어 아지랑이처럼 하늘거리며 피어오르는 꽃잎들로 반추하면서 그 옛날을 음미하고 회상해 본다. 이제는 아무리 애를 써도 돌아갈 수 없는, 아름답고 풋풋했던, 그리고 또한 아프고 애틋했던 우리의 젊은날들, 그래서 그 시절에 더 애착이 가고 그리운 마음이 더해지는 이야기들. 그때 그 시절을 함께 했던 동기들과 같이 추억하며 기억을 더듬어 가고자 한다


후보생 시절

 

1. 나의 대학생활과 ROTC

 

서울대학교 약학대학은 당시 마로니에로 유명한 동숭동 문리대 건너편, 의과대학과 함께 연건동에 캠퍼스가 있었다. 

나는 고등학교 시절 문과였으며 문리대를 지망하고 있었는데 문리대를 나와 동아일보에서 편집부장으로 계셨던 외삼촌의 말씀이 본인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집안 풍족하여 유학을 다녀오지 않는 한 교수되기도 힘들고 직업을 찾기도 쉽지 않은데다 앞날이 불안정하니 차라리 빨리 졸업하여 확실하게 직장을 잡을 수 있는 이과를 가라고 말씀하셨고 그 권유에 따라 입학시험만 문과에서 이과로 바꾸어, 약대를 지망하여 입학하였다. 


나는 가능한 한 빨리 대학을 나와서 당시 국민학교 교감선생님셨다가 중풍으로 쓰러져 몸이 불편하셨던 아버지와 고등학생이던 동생을 부양해야하는 절박한 상황에 놓여있었기 때문에 학비도 비싸고 6년을 다녀야하는 의대 보다 4년 만에 졸업이 가능한 약대를 택하게 된 것이었다. 나는 화학은 좋아하였지만 고등학교 때에 문과였기 때문인지 입학 후 1학년 초기에는 약대 공부보다 문과 강의들에 흥미가 더 많아서 길 건너 동숭동 문리대에서 문리대, 법대를 다니던 고등학교 친구들과 함께 장자 등의 강의를 청강하러 다녔다. 그러다가 약대의 서클인 ‘소모임’에 들어간 후 점차 약대 친구들과 친해졌고 약대 공부에도 흥미를 갖게되었다. 


내가 가입한 ‘소모임’은 한국전쟁 후 우리가 가장 가난하던 1950년대 말에 약학대학 선배님들이 당시 가장 빈곤층이었던 농촌에 찾아가 그들을 위하여 황소처럼 묵묵히 일하자는 뜻으로 시작한 약대의 유일한 이념 서클이었다. 우리는 선배님들이 생각하셨던 것처럼,  국립대학를 다니면서 국민이 내는 세금 덕택으로 사립대학교에 비하여 학비를 반 값만 내고 학교에 다니는 혜택을 입고 있는 만큼, 국가와 민족을 생각하며 무엇인가를 해야한다는 사명감이랄까, 의무감이랄까 모두들 조금씩 그런 생각들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이과생이면서도 조국의 앞날을 생각하면서 열심히 철학, 사회과학 서적들을 읽고 공부하였다. 그 당시 우리는 다행이 학생들의 그룹활동을 위하여 주어지던 써클룸을 배당 받아 그 방에 모여 함께 점심을 먹으며 토론도 하고 삶에 대한 진지한 이야기들을 나누며 서로 친해질 수 있었는데 나는 ‘소모임’ 멤버들, 특히 박광준, 조용한, 김상철군과 가까웠다. 우리는 수업시간 이외에는 늘 그 방에 모여서 함께 지내며  명심보감, 고문진보, 채근담, E.H.Carr 의 '역사란 무엇인가' ,  Gunnar Myrdal ‘빈곤의 도전’, 이영희의 '우상과 이성’, ‘전환시대의 논리’, ‘8억인과의 대화’, 함석헌의 ‘뜻으로 본 한국역사’, Alvin Toffler ‘제3의 물결’, John Kenneth Galbraith‘불확실성의 시대’, Erich Fromm 의 ‘자유로부터의 도피’, ‘소유냐 삶이냐’  Franz Fanon  ‘대지의 저주 받은 자들’ ,데카르트의 '방법서설', 논어, Che Guevara 전기, 신동엽 전집, 칼릴 지브란의 ' 예언자', 파블로 네루다의 시집 등 여러가지 사회 정의에 관한 책들을 함께 읽고 토론도 하면서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길렀었던 것 같다 


2.  Optimist & Pessimist (옵티미스트와 페씨미스트)


그 중의 한 친구, 나의 삶에 많은 영향을 준 박광준 군은 좀 특이한 사람으로 성격이 매우 단순하며 어찌보면 바보스러울 정도로 마음이 맑고 순수하여 이세상 모든 사람들을 좋은 사람으로, 모든 상황을 긍정적으로만 생각하는 친구였다. 대학교 입학식 날, 모두들 학교 뱃지를 단 교복을 입고 학교에 왔는데 그는 교복 차림에 축구화와 축구공을 가슴에 안고 나타났다. 그리고는 누가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우리들에게 " 나 오늘부터 축구 열심히 할거야, 그동안 공부하느라 운동을 못했는데 이제부터 운동 열심히 해야지" 하고는 식이 끝난 후 혼자 공을 차던, 조금은 엉뚱한 친구였다.

 

또한 1학년 교양과목으로  체육 과목이 있었는데 우리는 기말고사로 테니스를 치는 실기 시험을 보아야 했고 따라서 모두들 테니스 라켓을 사서 연습을 해야했다. 그런데 우리 같은 과 친구 중에 테니스를 좀 치는 친구가 부업으로 테니스 라켓을 사다가 친구들에게 팔았는데 그도 그에게서 라켓을 구입하였다. 내가 살펴보니 학교 매점에서 파는 것과 똑같은 것 같은데  값만 조금 더 비싼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작은 소리로 같은 제품을 비싸게 산 것 같다고 귀뜸하였는데 그는 내게 라켓을 보여주며 " 그럴리가 없어. 그가 친구인 내게 매점보다 비싸게 받겠냐? 봐라 !  테니스 잘 치는 그 친구가 골라준 것이라 튼튼하고 좋지 않아? " 하고  말하였고 나는 그렇게 대답하는 그에게  무어라 응답할 말을 잃었다. 그는 매일 아침 눈을 뜰 때마다  "오늘은 또 무슨 즐거운 일이 일어나서 내가 행복할까? " 라고 설레인다는 무지막지한 옵티미스트여서 극단적인 페스미스트인 나와는 극과 극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더 친해졌던 것 같다. 그는 육체적인 것보다는 정신적인 것, 공부만 중요하게 생각하던 나에게 운동의 중요성을 깨닫게 하여준 친구이기도 하다. 매일 점심 식사후 그는 평행봉를 하거나 팔굽혀펴기를 30개씩하는 거였다. 그리고는 팔굽혀펴기 단번에 30개 하기는 힘들지만 매일 하나씩 늘려 가면 곧 쉽게 30개를 할 수 있다는 조언까지하며 팔굽혀펴기를 매일 해보라고 나를 독려하였다. 그래서 45년이 지난 오늘도 나는 매일은 아니지만 틈나는대로 하루에 50 개씩 팔굽혀펴기를 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는 요즘에는 팔굽혀펴기는 그만 두었고 종목을 바꾸어 대신 수영과 단거리 빨리 달리기 등을 한다고..

 

3.  ROTC를 지원하다

 

우리는 테니스를 치는 등 함께 운동하면서 더 친해졌는데 그러던 광준이가 1975년, 3학년에 올라가자 갑자기 ROTC 를 지원하였다. 우리는 그때 대학생들은 졸업때까지 입대가 연기되므로 아직 군대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이나 생각은 없었고 막연히 졸업하고 가야지, 하거나 과학기술원 KIST 에 가면 면제가 되는데 하며 별다른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는데 그가 군사훈련을 받기 시작하자 나도 ROTC 에 관심이 갔다.


그러던 중 3학년 1학기가 두 달도 더 지난 때, 그 해에만 유난히 ROTC 지원이 적었는지 추가로 ROTC 지원자를 모집한다고  공고가 나붙었고 그가 나를 꼬드기기 시작했다. 나는 그 당시 고등학생인 동생을 데리고 마포에서 자취생활을 하고 있었고 거의 매일 연탄불을 꺼트려 밥은 커녕 라면도 잘 못 끓여먹었고 못 먹어 삐쩍 말라 체중도 미달인데다가 키도 작았다. 당시에 고등학생 한 명을 가르치면 한달에 5만원 정도를 받았는데 한학기 등록금이 5만원이 안되었으니 그때는 지금에 비하면 사회에서 사람들이 대학생들에게 대우를 매우 잘해주었던 것 같고 한달 정도만 일하면 등록금을 해결할 수 있었다.


나는 아르바이트로 학비와 방값, 생활비 벌랴, 밥 해먹으랴 스트레스가 많아서 심지어 한번은 영양실조로, 버스를 타고 서서 가는데 갑자기 시야가 캄캄해지고 별이 보이면서 쓰러져 잠깐 기절한 적도 있었다. 게다가 나는 운동에 별로 소질이 없어 육체적으로 많은 체력이 요구되는 격심한 군사훈련을 다 견뎌낼까 자신이 없었다. 그런데 그 때에는 초임장교가 모자라 특히 서울대학생들은 지원만하면 모두 합격시켜준다는 교관의 꼬임의 말에 넘어가, 또 광준이와 함께 친구 따라 강남간다는 식으로 얼떨결에 지원하고 말았다. 그리고 우리는 그들의 말대로 신체조건에 크게 관계 없이 추가 지원자들도 모두 전원 합격하여 함께 총을 들고 연건동 언덕길을 구보하게 되었는데 몇달 먼저 시작한 동기들은 우리들을 반년만에 1년차 훈련을 끝내었으므로 1년차가 아니라 반년차 라고 놀려댔었다.

 

나는 달리기는 좀 했지만 운동신경이 둔하여 공을 가지고 하는 운동들을 잘하지 못하였는데 특히 던지기를 잘못하였다.

그래서 수류탄 던지는 시험을 보는데 바로 앞에다 내동댕이쳐서 교관이 "야, 임마 너는 그 수류탄에 네가 죽겠다" 하던 말이 기억이 난다. 나는 그렇게 처음으로 열등생이 되었다. 총기의 분해 결합이나 제원, 제식훈련, 통솔법, 독도법 등에 관한 이론 필기시험은 공부를 열심히 하면 잘 볼 수 있었지만 몸으로 때우는 실기시험은 나름대로 노력을 했음에도 나에게는 어렵기만 했고 힘이 부쳤다. 특히 군사학은 실전을 중요시 하고 실기시험의 비중이 훨씬 높기 때문에 더 고전했던 것 같다. 당시 성적순으로 병과 즉 의무행정장교를 선임하고 성적이 나빠 군번이 무거우면 보병으로 임관되어 전방에 배치되어 소위 뺑이를 치게된다는 소문이 있어 동기들 간에도 알게 모르게 점수를 잘 받으려고 경쟁이 치열했던 것 같다. 

 

4.  3학년 1학기 군사 훈련과  김관진 대위님

 

연건동에서의 군사훈련은 을지로 6가에 있던 음대생들과 함께 모여 일주일에 두번 4시간씩 훈련을 받았고 그때 음악대학생들로는 테너 김철회와 음대 오페라단이 공연했던 ’ 라보엠’에 출연했던 목소리가 굵은 바리톤 안지환군, 국악과의 대금을 불거나 거문고를 타던 하주화 등이 기억나고 당시 교관은 키 크고 잘 생긴 김관진 대위님이셨다.


김대위님은 서울고, 육사 출신의 최고 엘리트 장교로 독일 육사를 마치고 돌아와 바로 우리 교관으로 부임하셨기 때문에 독일어가 유창해서 우리가 독일어 회화를 가르쳐 달라고 졸랐다. 그래서 현역군인인 교련 교관이 우리 간부후보생들에게 일주일에 두시간씩 토요일 오전에 도서관에 모여서 독일어 회화를 가르쳐주는 희한하고 특별한 일도 벌어졌다.


우리는 그때 그 분이 군사학의 지식 외에도 인품도 휼륭하고 리더로 뛰어난 자질을 보여주셨기에 즐겁게 따르고 교관과 후보생의 관계를 넘어 친분을 쌓았던 것 같다. 그러나 그 분은 굉장한 신사이면서도 원칙에 대해서는 엄격 하셨고 단호하셨다.  지금도 ROTC 훈련 첫날 첫 집합 때의 일은 기억에 생생하다.


김대위님께서 우리 후보생 전체를 집합시킨 후 우리에게 비스트 트레이닝의 일환으로 첫 명령?을 내리셨는데 (나는 그것이 첫날, 첫 집합시에 시행하는 Beast training 이라는 사실도 몰랐다) 그것은 방으로 들어가 입고 있던 교복을 벗고 새로 나누어준 군복으로 갈아 입고서 교정에 선착순으로 집합하라는 것이었다. 우리는 뭣 모르고 시키는대로  옷을 갈아 입고 연병장에 집합을 하였다. 그러자 그 분  왈, "다시 들어가 교복으로 갈아입고 나온다. 실시 ! " 하셨고 우리는 무슨 영문인지도 모르고 하라는대로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옷을 갈아입고 선착순으로 집합 할 때 마다 중대장님은 군복을 교복으로, 교복을 군복을 다시 갈아입고 오라고 명령하셨고 우린 "이게 뭐지?  뭔 훈련이 이래" 하고 속으로 생각했으나 따를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 단순하고 쉬워 보이는 옷 갈아입기 동작을 선착순으로 한 다섯번 쯤 계속하자 그만 우리들은 힘이 들어 허덕이고 씩씩대기 시작했으며 열번쯤을 반복하자 가장 덩치가 크고 통통했던 손영택이가 제일 먼저, 그리고 여기 저기서 한명씩 쓰러지기 시작했다. 그 훈련은 스무번 이상 계속 되었던 것 같고  결국 반 이상이 쓰러지고 나서야 끝이 났다. 땅바닥에 드러누워서 그때서야 나는 아무리 쉽고 단순한 동작도 계속적으로 반복하다 보면 엄청난 스트레스가 될 수 있다는 교훈을 얻게 되었고 때리거나 괴롭힘 없이도 정신통일을 위한 얼차려를 줄 수 있다는, 새삼 그 얼차려의 의미를 깨닫게 되었다.


내가 이것을 훗날 사병들을 얼차려 시킬 때 사용한 해 본 것은 물론이다. 후에 듣자니 다른 후보생들의 첫날 비스트 트레이닝은 자갈밭을 몇 시간 동안 낮은포복으로 박박 기게 하는 등, 정말로 혹독한 것이었다고 하니 우리가 받은 이것은 매우 점잖은 편이었고 그래도 그 훈련의 의미는 고스란히 전달된 것이었다. 지난번 한국에 갔을 때 박광준 동기가 김관진 대위 이야기를 하며 당시 육군 참모총장을 거쳐 국방부장관을 하고 있는 김관진 장군이 바로 그때 우리 교관이었던 그 김관진 대위였다고 해서 또 한번 놀랐다. 그러나 옛날 그분의 덕성과 지혜와 리더쉽을 생각하고는 그 분이라면 충분히 그럴만한 역량이 있는 분이라고 생각하여 기쁘고 자랑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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