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위 시절! 임관 후 첫 부임한 부대,
배치 받은 곳이 막사가 있는 자대가 아니라 1168미터 국망봉 정상에서 신고식을 했다.
7월
뜨거운 태양 아래 유개호 철근콘크리트 진지공사로 사병들과 함께 온 몸을 땀으로 적시던 젊은 날의 열정과 우국충정이 베어있는 곳이다.
13기
선배로부터 인수인계를 받은 궁예의 전설이 서린 이곳, 광덕산은 명성산, 백운산, 국망봉, 강씨봉으로 이어지는 슬픈 전설이 있는 곳이다. 이
준령이 하나의 한북정맥이다. 어제도 풍성한 갈 잎 산길을 푹푹 빠지면서 동기들과 함께 젊음을 다시 되찾았다.
동서울 터미널에서 9시에 출발하는 사창리행 버스를 예매했기에 무사히 탈 수 있었다.
30여명의 면회객들이 입석표를 사서 줄을 서 대기상태다. 여기서도 정보의 격차를 느끼게 된다. 인터넷으로 예매를 하지 못한 지방에 거주한 분들이 대부분!
거의
모두가 자식이나 애인을 면회가는 분들이다. 저 분들은 아들 면회가는 데도 어려움이 많구나.
지금은 노하우(Know how)가 아니라
노웨어(Know Where)시대다. 인터넷을 모르면, 아니 알더라도 온라인 결재하는 것이 무슨 큰 재앙이 된듯 기피하는 사람은 1시간 후에 있는
다음 차라도 탈 수나 있을까 싶다.빈자리가 없으면 정오가 되어도 탈 수나 있을까? 아들은 많이 기둘리고 있을텐데 !@#$%^&*
막힌 퇴계원 길을 따라 2시간만에 버스는 가파른
광덕고개를 넘어 펜션 앞에서 멈춘다. 많이
변했다.
광덕고개 마루에는 궁예의 핏물 같이 짖붉은 단풍이 아직 숨을 헐떡이고
있다.
등산로 표지가 보인다. 그런데 등산로는 이미 큰 도로로 변해 있었다. 화천군에서 광덕산 정상에 기상 천문대를 유치하고 테마단지를 조성 중이라서 한창 도로를 포장 중이었다. 포장공사를 하느라 오가는 트럭을 피해가며 1시간 가량을 오르니 천문대가 나타난다.
천문대에 이르니 두려워 짖는 어미 개와 강아지가 꼬리를 흔들며 반긴다.
울타리
저편 남쪽으로 광덕산 정상과 박달능선이 보인다. 저 능선을 쭉~ 따라가다 보면 백운계곡이 나오겠지... 아~ 언제 저 능선을 다지나가나~~~오늘 산행은 오르는 것 보다 내리막 길이 3배, 이제 3시간 정도 저 길고 긴 능선을 따라 걸어야 백운계곡으로
돌아가겠지. 촉감이 푸근한 흙을 밟으며 광덕산 정상에 오르니 사방이 모두 발 아래 늦가을 갈색 천지다.
북쪽으로 상해봉도 안개 속에서 그윽하고, 동쪽으로 백운봉과 국망봉이 손에 잡힐
듯,이 일대에서 수색소대장 시절 부하들과 함께 대항군으로 인민군 복장을 하고 국망봉에서 방어하는 아군을 교란시키던 옛추억이 새롭다.
몇 가지 큰 사건을 기억나는데로 읊조리면
- 이동 뒷쪽 유리 채광굴 근처 계곡에 여름이면 군단장 흉양터라고 자연풀장 만들고, 우리는 주변에서 보초를 섰던 울화통 터지던 일,
- 사단장(유근환) 지시로 3월, 아직 눈이 1m나 쌓인 국망봉 정상의 철쭉 괴목들을 어렵게 파헤쳐 군단장 관사, 육참총장 관사 ... 등지로 보냈던
일, (지금이라면 9시뉴스 깜이네)
- 45kg무게의 완전군장을 메고 100km를 밤새도록 걷고나면 화장실에서 앞뒤로 손을 짚고서야 겨우 볼 일을 볼 수 있고, 간부들은
모두 무릎이 고장나 조치미(동네) 돌팔이 침쟁이를 찾아다녔던 일,
- 100km 행군 날짜가 발표되면 심리적 공황상태가 와서 사병들이 시름시름 병이 생겼고, 결국 10중대 김xx 일등병은 화장실에서
통일화 끈으로 목을 메달았던 불행한 일(이걸 본 이후로 난 아들 둘을 중학교 들어가진 전까지 호되게 기합을 주면서 키웠다.),
- 3월 교통호 보수공사 중에 9중대 상병이 106미리 고폭탄을 캐내어 호 밖으로 내던지니 처다보던 고참 병장(전역 7일 남겨두었다)이 "녹쓸었다. 터지나 볼까?"
하면서 야삽으로 뇌관을 때리는 순간 엄청난 굉음과 함께 주위 사방 4~5m가 웅덩이가 파일 정도의 위력으로 폭발하고 자신의 하반신은 모두
날아갔는데도 "아이고 배야 아이고 배야~" 를 외치던 그를 군의관이 흘러내린 장기들을 대충 모아서 실과 바늘로 꿰맨 다음 헬기로 수도통합병원으로 보냈는데 목숨은 건진 대표적 안전사고가 생겼던 일 ...
- 대대 ATT를 하던 날, 국망봉 OP까지 통신선을 까느라 땀을 뻘뻘 흘리며 고생하는 한경철(숭실대) 중위에게 늦장부린다면서 그의 발을 향해 실탄을 장전하여 총질을 해대던 미치광이(이 때 착한 한중위는 선 채로 방뇨를 했다), 11중대장 육사30기 뒷통수를 철모로 때려서 실시시켜 후송시킨 미친 중령, 마누라에게 권총을 겨누고 엄포를 해대다 권총 꽁무니로 머리통을 쳐서 실신시킨 이상한 남편... 작전시에는 그가 나를 직접 지휘하던 전투 대대장이었다.
난 이 정신병자 대대장 때문에 야전군에서 교수라는 직능으로 진로를 바꾸고 말았다.
그가 이런 횡포를 하는데도 아무 탈 없었던 것은 군단 보안대장과 갑종간부 절친이었기 때문 ...
그 이름은 경희대 ROTC훈육관을 역임했던 진xx(고려대 출신 농구선수 진xx의 친형이다)
- 어느날 CP 보초를 서던 우리 소대 상병이 "대대장님이 찾으십니다" 해서 들어서자 마자 가죽장갑을 낀채로 원-투-스트레이트를 10여분간이나 씩씩거리면서 날아왔다. 참다 못해 그의 허리를 등뒷에서 붙잡아 무릎을 허리에 대고 꺽으면서
"씨~발 이유나 알고 맞아보자" 고 같이 들이댔다. 그가 디스크가 있다는 약점을 알았기 때문에 ...
한참을 그 자세로 그를 제압했더니 씩씩거리며 스텐 지휘봉을 책상에 꽝~내리꼽으니 구멍이 뚫리고 말았다. 나는 겁이 덜꺽 났다. 혹시 또 권총을 꺼내들고 정말 쏘아죽일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밀려왔기 때문이다. 다행히 그가 먼저 문을 박차고 밖으로 나갔다. 키187cm, 체중90kg의 거구!
그는 현대판 장비다.
사단 전체에 소위라고 단 한 명인 나를 수색소대장으로 9중대 소대장에서 3개월만에 재보임한 대대장이다. 그는 나를 꼬붕으로 착각한 오야붕이었는지도 모른다.
어느 날 점심시간 간부식당에서
"수색소대장 있나, 내가 월남에서 작전을 나가기 전에는 개를 한 마리씩 꼭 했는데 말이야~ ㅎㅎㅎ" 이렇게 호방한 웃음으로 시그널을 보내오면 그 날 석회시간에 난 선임하사를 불러 지시를 내렸다.
"대대장이 개를 잡수고 싶은가 보다" 그 이후의 일은 여러분의 상상에 맡긴다.
그는 자녀가 없었다.
그래서 동생의 딸, 조카를 입적시켜서 아내가 잘 키우고 있었다.
어느 쪽이 문제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아마도 그래서 포악했를지 모른다고 늘 생각했다.
16연대 3대대에 같이 배속 받은 동기들(통대장 한경철(숭실대, 미국? 이민), 9중대 오성석(고려대, 기계체조 선수), 10중대 문충성(영남대, 전 포항시장 아들), 11중대 김영원(대구대, 유명한 헌법학자 서울대김철수교수 동생), 12중대 김정석(조선대, 친박연대 국회의원후보, 건설회사 사장 그리고 소인 )
아! 이제 군대 히스토리는 이 정도로 하고, 믿거나 말거나 궁예와 강씨의 스토리는 이렇다.신라
헌안왕의 아들이었던 궁예가 철원에 도읍을 정하고 나라의 틀을 갖추어가던 중에 폭정이 심해지자 그의 부인 강씨가 궁예에게 간언을 하지만 듣지 않고
오히려 강씨봉으로 귀양을 보냈다. 그 후 왕건에게 패한 궁예가 잘못을 뉘우치고 강씨를 찾았으나 이미 죽은 뒤라 일찍 찾지 못한 회한에 잠겨
국망봉 정상에 올라 도성 철원을 바라보고 "國望峰"이란 전설도 있고, 강씨가 궁예가 망할 것이라며 늘 원망하며 울었다고 하여 "國亡峰"이라
부르던 것을 후일 "國望峰"이라고 했다는 설도 있다. 박달봉을 지나는데 바람에 제법 쎄다.
큰 바위를 의지하여 준비한 도시락과 화천 막걸리로 엔진오일을 보충했다.
능선을 따라 내려오는 내내 군데 군데 교통호와 참호 주변에 생수병이 나뒹굴고 과자봉지들이 흩어져 있다. 여긴 8사단 작전지역인데 ... 이게 우리 병사들이 한 지꺼리라고는 상상하기가 싫다. 야비군인가? 아님 단체로 산행을 한 젊은이들의 짓인가? 이게 정말 우리들이 믿고 있는 사병들의 짓이라면 어쩌나?
우리도 벌써 월남전에서 미군들 처럼 나이롱 군대로 변했단 말인가! 괜히 걱정스럽다.
꼭 3시간을 달려 백운계곡으로 내달리니 연천에서 아스콘 공장을 하면서 돈을 많이 번 최상준(중앙대) 친구가 아들 (학군40기)을 기사로 대동하고 단숨에
달려 왔다. 성당 사목회가 가평에서 있어서 가는 길목에 친구들 얼굴이나 보자고 왔단다. 전국 어디를 찾아도 이런 ROTC 동기들이 있어서 참 좋다.
덕분에 그 친구가 사준 송(은진)씨네 이동갈비에서 또 막걸리를 한 순배씩 돌렸다.
김일현 회장과 최상준 회장의 우정에 감사를 드려야 하겠다.
최회장 부인 로사씨께도 감사 하다는 안부인사 부탁드리오. ^^
땀을
많이 흘려서 인지 갈 길은 먼데 벌써 취기가 돈다. 1시간여 간격으로 있는 동서울행 버스를 타기 위해 아직 미련이 남은 친구를 재촉하여 자리에서 일어서니 시계는 벌써 오후 5시반을
가르키고 있다. 광덕산-백운계곡-국망봉, 여우고개-도마치고개-김일성별장- 산정호수-승리훈련장-영노교 등등...
나의 젊은 청춘!
소위 시절 추억으로 아직 생생하게 살아있는 이곳을
훗날 아내와 함께 다시 찾아와 54,000원짜리 소위 봉급에서 5,500원씩을 떼어 18년간 큰 아들 교육보험료로 적립했던 우리들의 "삶의 노래"를 도란 도란
나누겠노라고 다짐하면서 101차 정기 산행을 마감했다.
동서울에 도착하여 맥주로 입가심 하자는 이계인 친구의 청을 뿌리치고 보금자리로 향한 발거음은 아쉽지만 또 다음 달의 만남을 기대해 본다.
끝까지 읽어주신 동기들께 감사 드립니다.
나도 일동에서 근무 했지만 많이 변해 있더군요.
잘 읽었습니다.
광덕산,국망봉일대에 소위시절의 그런 파란만장의 추억들이 있을줄이야....
좋은글 생생하게 잘 읽었습니다.
이동 막걸리로 회식 하면서 취침 점호 때까지 신나게 곱사춤 추면서 반합 두드리면서 창가를 뽑아야 ...월 1회씩을 해줘야 대대에서 문제사병으로 낙인 찍힌 아그들 집합시킨 수색소대가 폼을 잡는다네.
ㅎㅎ 조교육감!
그댄 아직도 내 전우가 아닌가 보오. 오래 전에 이미 밝혔었는데 ... 우린 넘어져도 발딱 일어서는 오뚜기였다오. 그 놈에 카레를 많이 먹어서인지? 아마 앞으로 죽을 때까지 치매도 없을기요. 그 때 먹은 카레 때문에 ㅋ~
한국전쟁 당시 영천전투에서 북괴군을 괴멸시켰고, 더 이상 회복 할 수 없도록 만들고 국군이 북진의 계기를 마련했는데, 이때 영천 탈환에 중심에선 군대가 8사단이죠.
8사단은 사단본부를 비롯해 10연대 16연대 21연대, 50포병대대 등이 영천 탈환을 성공적으로 이끈 부대라는 걸 기억 하시오.
허지만 뼈아픈 전사로는 51년 1월4일 서울을 재점령 후 중공군 4차공세로 홍천 삼마치고개 전투에서 적과 대치하던 8사단은 불과 4시간만에 사단이 해체될 정도로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이로 인해 10군단(3, 5, 8사단) 전선 중앙부가 구멍이 뚫리는 일이 벌어져 원주로 철수했다, 강원일보기사
그러나 우리가 근무하던 35년 전에는 신편제 시범사단, 군사령부 군단 예비, 교육훈련 사단이란 것 때문에 너무 고상을 해서 지금도 그 쪽을 향해서 오줌발도 누기 싫어하는가 보오. ^^
두현 동기 글을 일고 있으니 추억이 정말 새롭고 세월이 빠르다는 생각이 듭니다. 세월을 갈 지언정 우리 동료애는 변하지 말고 건강하게 남은 세월 즐겨 봅시다. 두현이 좋은 글 즐감하고 물러 갑니다. 8사단 10연대 태권도 선수들이 13공수 73대대에
와서 훈련 많이 하고 갔지 그 당시에 ......
이동 골짜기에 13공수가 있었지. 진앙이도 그곳에서 칼을 갈고 있었네 그려.
눈오는 추운 겨울 날도 웃통 벗고 맨살로 아침구보 하면서 군가가를 부르는데 무슨 악다구니로 들리던지 ㅋㅋ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육군의 베레모들 !!
갈등과 번민이 많았을까, 우리는 이미 죽었다 생각하고 마음 모질게 먹고 가니 그런대로 견딜만 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당시 수많은 난관을 극복한 경험이 지금의 내가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만,어째든 지금 다시 군생할을 한다고 하더라도 나는 다시 특전사로 갈 것 같습니다. 아마 홈피 들어 오지 않는 동기들도 많은 추억들이 있을터인데,이번 기회에 박두현 동기 칼럼에 못다한 군대 이야기를 만들어서
모든 동기들에게 문호를 개방하여 추억담을 들어 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관리자님? 나 역시 아주 많은
이야기가 있지만서도 아직까지 밝히기가 거시기한 부분들이 .... ㅋㅋㅋㅋ.....환절기 건강관리들 잘하시구려~! 기회가 되면 찾아 뵙겠습니다, 두현 동기!!!
술 한잔 들어가면 입담으로는 제갈공명인데
독수리라서 홈피만 보면 눈팅만 하는 동기들이 많아서 ~
암튼 별도 분류로 "군대야그"로 올려 보겠습니다. 많이 애용하여 주세요.
어떻게 이렇게 글을 잘쓸까? 하고 감탄하면서...! 덕분에 35년전 소위/중위시절의 비슷한 추억들을 반추하면서 잘보고 갑니다!
작계반경이 너무 넓어서 고생스러웠다는 오뚜기부대 전우들의 도가니(^_^) 건강을 기리며..! ^^*
무슨 말씀을 하시나요.
글 솜씨야 서교수를 비롯하여 조주현 장학관, 우보 현중재, 청림 정택영, 해원 울산군단장 ... 등 대가들이 줄줄이 계시지오. 저야 그저 일기쓰듯 흉내만!!! 부끄럽습니다.
우리 동기들은 모든 재능에서 뛰어난 동기가 많습니다, 모든 분야에 박두현부회장님의 글을 읽으며 참으로 산행기를 이렇게 잘 표현하는 동기가 있다는 사실에 뿌듯합니다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저는 잘 쓰고 싶어도 재주가 모자라 이것 밖에는 안되니 양지 하시길 ^^
아름다운 그대의 작품 사진이 있으나 제 글이 쫒아가지 못해서 죄송 합니다.
임샘 요즘 바쁘신지 통 뵙기가 어렵네요. 다음 달에는 꼭 !!!
어쩌면 저렇게 이름과 상황을 정확히 기억 하고 있는지???
암튼 대단한 기억력의 소유자...전번 서옥하 교수도 그렇더니만...
이런 저런 옛날 생각에 산행하면서 조용히 걸었군요.
그래서 거기서는 오줌도 안누었군...
막걸리 덕분에 영역표시 하느라 오짐 다섯 번은 쌌네.
한이 맺혀보세요. 그러면 저절로 기억에 박힙니다. ㅎ
대구대 김영원이는 어디에서 사는지?
사병들과 잔밥으로 끼니를 해결 하면서 봉급을 한 푼도 안쓰고 꼬박꼬박 모았던 대단한 경제장교였는데 ^^
정말 군대 생활 제대로 한것 같네.
대부분 그럭저럭 별 긴장감 없이 전역을 한 동기들이 많을톈데...
나는 포병 중에서 전포대장을 하여 나름 고생도 하고 군대생활이 고됐다고 생각했는데
이 감동적인 글을 읽어보니 군에서 고생한 장교고 많구먼.
예~ 월남전 만큼은 아니어도 제대로 했습니다.
책임감 강한 장교가 탈영하고 싶은 생각이 문득 문득 드는데 사병들은 오죽 했겠습니까?
더구나 전임 육사 16기 대대장은 적당히 해도 모든 측정 검열에서 1등인데, 진급 욕심 많은 갑종간부에서 젤 잘 나간다는 이 미친갱이 대대장은 사단작전참모가 되고 싶어서 별 굿을 다하였는데도 진급도 못하고 울진에서 3차 대대장을 하는 신세가 되었다는 것을 50사단 체육대회에 배구 심판으로 초대되어 가서 알았습니다.
사단장 차성호 장군이 3사관학교 생도대장으로 근무하다 50사단장으로 영전했던 터라 체육과 교수들을 심판으로 초청한 것,
그런데 인연이란게 무섭습니다. 제가 대위 3호봉 때 전역을 앞둔 봄 50사단 연병장에서 만난 초라한 진중령이 불쌍해 보이데요. 연민의 정이라할까! 그렇게 기고만장하던 장비같은 분이 제게 이제 끝났다고 신세타령 하는 걸 보니 안되어 보여서 도와주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3사 생도대장 때 차장군이 저어 대해 각별히 호의적(?)이었던지라 그 날 저녁 공관에서 예정된 연대장급이상 회식자리에 진만준 대대장을 사회자로 추천하였습니다.
"사단장님, 제가 소위 때 8사단에서 대대장으로 모시던 분이 아직 진급도 못하고 계서서 깜작 놀랐습니다. 비록 갑종출신이고 성질이 좀 못되서 그렇지 그런 실력있는 분이 군에서 오래 계서야 한다고 생각 했는데 안되어 보입니다. 진중령이 입담도 좋고 MC실력이 탁월하니 저녁 회식자리에 사회자로 맡기면 어떻겠습니까?"
"고래~ 그런 장교가 우리 사단에 있었어!, 그렇게 하도록 부관하게 일러두지"
이 사실을 진중령에게 일러주고, 준비 잘 하라고 했더니 몇 차례나 고맙다고 하데요.
차장군은 이북 출신으로 공사가 분명한 덕장. 대구 차병원 원장이 형이고 돈에 구애 없이 오직 명예를 위해 군생활을 깨끗하게 하시는 분, 생도대장 시절 공관에서 장교 회식 때도 장교는 정복, 부인은 한복을 반드시 입고 오도록 해서 실내악단을 초대하여 사교댄스를 교습 할 정도로 멋진 군인이었습니다. 내 생애 그 분만큼 멋진 장군은 보지 못했네요. 한 마디로 장교의 긍지를 느끼게 만드는 지휘관이었습니다. 진만준과는 극과 극이죠. 이 때 저는 군에도 천당(차성호)과 지옥(지만준)이 동시에 존재 한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군에 PC가 없던 1980년 초에 이미 전 장교들에게 타자기(크로버)를 할부로 구매하도록 하여 보고서는 장교 본인이 직접 타이핑 후 보고 하도록 할 정도로 선견지명이 있던 분!
"대벌"이란 소설을 구매하여 읽게 하고 조회 시간이면 그 내용을 각권별로 발표케 하는 지장이기도 합니다.
제 예감은 적중했습니다.
진중령은 그 날 밤 사회를 너무나 멋지게 해냈고, 육사출신 경쟁자와 참모들을 물리치고 진급 서열 1번으로 올라가서 대령진급을 말차로 했습니다. 그리고 차장군 밑에서 참모장을 하다가 육본 교리발전처에서 마지막 임무를 마치고 전역 하였네요.
나두 연대장, 1, 3대대장 육사 선후배지간 사이에 갑종간부출신 대대장 밑에서 그리고 3사 4기생 2차중대장을 중대장으로 뫼시면서 원리원칙에 의거하야 실력으로 인정 받을려는 대대장 중대장 등살에 융통성이 뭔지도 모르고 소대장 근무하던 전방시절이 새록새록 다가오는구먼 소대원 한놈 국립묘지에 묻어면서 ㅉㅉㅉㅉㅉ
열심히 한다고 진급하는 것은 아니데요. 당시는 하나회(TK가 주류) 멤버나 육사라야 개판쳐도 검열이나 측정관들이 점수를 높게 주면 되는 세상!
박두현 동기의 착한 심성이 그대로 드러나는군! 나 같았으면 본척도 안했을텐데...!
거기에 비하면 나는 정말 윗분들 잘 만났었구나! 연대장 장기하 대령, 대대장 최수일 중령! 두분다 아직 살아계실려나? 뵙고 싶네!
나도 중대장 4분 + 1놈(아마 나처럼 중대장 많이 모신 동기는 없을걸?)중에서 꼴보기 싫은 중대장이 하나 있었지만...! 이제는 나도 용서(^_^)해 줘야겠다! 두현 동기의 착한 마음에 감화(^_^)를 받아서..!
잘 지내시게! 해피 바이러스(^_^) 박두현 동기!
착해서 그런건 아니고 차별이란게 눈에 보이는데 차장군이 그런 것을 싫어하는 인격 소유자라서 더듬수를 놨던거네요. ^^
특히 중대장들이 육사1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3사출신들(8~12기), 처음 보직받은 9중대장은 고교 동창과 동네 친구! 아마 이 중대장이 껄끄러워서 저를 다른 보직으로 바꿔 달라고 했던 모양~ 왜냐면 자기도 나를 알고 있었고, 더구나 고참 소대장들이 나 보다 후배들었기에 ...
암튼 중대장들이 내게 밉보이면 그 중대는 발깍 뒤집혔네요.
총기분실 사고가 나니까, 대대장이 중대장들 잡는 방법으로 밤에 수색소대 시켜서 총 몇 자루 훔쳐오게 하고 토요일날 대대장이 직접 내무사열을 하게 되니 ... 중대장은 고약한 대대장 밥. 그럴 수 밖에요. 3사 출신 중대장들이 단합을 해서 대대장 골탕을 몇번 먹였거든요.
지금 생각하면 참~ 재밌는 군대생활이었네요.
ㄱ 같은 대대장 만나서..
그래도 지금은 아련~한 추억으로 회상하며 얘기 할 수 있으니, 좋잖냐~
나도 또라이 같은 중대장 땜에 처음엔 고생 좀 했는데,
나중엔 그런가 보다 하니, 그럭저럭 넘어가더군..
역시, 세월이 약이야~
군대란게 촌 놈 출세하는데는 안성 맞춤인데 위로 올라갈수록 차별이 심했으니 생존경쟁에서 밀리지 않으려고 헛방을 지르는 대대장.연대장들이 많았던 걸로 이해 하고 있습니다.
우리 17연대도 이야기 많았는데......
그래도 만나면 추억이 되어 있더구만....
어쩜 그렇게 기억력이 좋아.
봉급금액, 관등성명,훈련내용까지...대단하십니다.
덕분에 병과와 근무지는 다르지만 35년전을 회상하게 해주어서
즐거웠습니다. 백두대간도 좋지만 일정이 된다면 송년등산에는
참석하고 싶습니다..
부러웠어요. 그 건강과 도전 정신이 ...
다음 달 산악회에 오셔서 백두대간 종주 미담도 들려주시고 산행기도 홈피에 부탁 합니다.
젤 부러운게 탑승하여 이동하는 동기들과 CP에서 어정거리는 동기들이드라. ^^
ㅎㅎㅎㅎ---- 오뚜기 사단이 최근 홈피에서 주축을 이루는구랴!! 8사단 21연대 5중대 2소대장으로 갔더니 우리 소대 입구에 '영천대회전 선봉소대'라는 현판이 있었다오. 계인이는 몇연대인고?
한국 전사에 길이 빛나는 영천대회전 !!!
15기 항공병과 조종사들도 재미있는 이야기가 많은데.......육군항공 최초로 ROTC장교들을 주축으로 구성한 육군항공학교 고정익 조종 79기......처음 30명이 항공학교에 입교하였으나 15명만 조종사 윙을 달았고 1명(장명환,충북대)이 임무수행 중 순직했고......7명은 5년 근무 후 전역....7명은 장기복무 후 모두 전역.....지금까지 비행기를 타고 있는 동기는 2명 모두 대한항공에서 보잉747-400 수석기장으로 근무 중.......항공학교의 비행교육이 얼마나 독한지는 여러 동기들도 들어서 알고 있을 것이다.
난생 처음 혼자서 비행기를 조종하고 하늘을 날았던 단독비행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몇십년이 지난 일들이었지만 언제 들어도 공감이 가고 재미있는 것은 우리들만의 특권이겠지.........
하늘을 날기까지의 고된 훈련과정과 에피소드들 틈틈이 올려 주시죠.
첫 댓글이신 것 같은데 충심으로 환영하고
자주 방문하여 주시길 박수로 우리 모두 짝~ 짜 악~ 쫙~
16주던가? 반년인가 더 훈련을 받아야 한다고 해서 보병하교 6주도 버거웠는데
다시 무슨 훈련이랴!! 돌아온 기억이 나네요.
정밀 신체검사 등등에서 떨어졌겠지만------. 내 팔자는 아니었던듯!!
내가 인제 교감으로 근무할 때 3군단 육군항공대장이 우리 15기였는데----
전북대 영어교육과 나왔다던가? 이름이 가물거리네.
술을 전혀 못하고 테니스를 좋아해서 항공단으로 테니스도 치러 갔었는데----
이젠 전역을 했겠지?
아무튼 김수원동기 반가웠네.
명환이 소식이 무척 궁금했는데 여기서 훈련 받던일 그리고 명환이 이야기도 좀 올려 주시게나 ~~~~ 혹시 울산 현대중공업에 근무하지 않았었나 ????
통화한번 했었던 기억이 나는디 ㅉㅉㅉㅉ
나 ~~ 울산 군단장, 허병국이 ~~ 울산군단 참모장,
인제에 위치한 13항공여단장으로 있었던 육군항공 오인식 대령은 항공학교 비행교육 같은조였는데.....아시다시피 조종교육은 1대1 전수교육이기 때문에 1명의 교관이 2명 만 맡고 있어서.....오인식이는 같은 비행기 같은 교관 밑에서 항공학교 7개월을 땀과 눈물을 같이 흘린 동기로 형재애보다 더한 전우애를 가지고 지금도 자주 연락하고 만나고 있슴. 참고로 본인은 현재 현대중공업에서 근무하고 있으며 동기회 홈에 자주 들리나.....글 올리는 것은 처음임.
보람병원 신청사 정문 바로옆에있따 ! 내일 신고해라 배운데로 ~~~~~~~
아~암 사단장까지는 찝차와 쎄단까지고
군단장부터는 뱅기가 있지
그런데 문무대 옆에 비행장이 없어 어쩌나 헬기 앉기도 좁을텐데~~ㅋㅋㅋ
여기서 이러지만 말고, 직접 전화해서 안내 하시지요~
엄~청~ 반갑겠네~
충북대 동기 소식도 자세히 듣을 수 있고..
전주시내에서 정시 출 퇴근하며, 자대배치부터 공사장교겸 공사감독관만하다 소집해제된 공병장교로 할 말이 없네.
소대장한번 못해보고, 그래도 ATT, RCT 훈련에 참가했던 경력은 있고, RCT 배속나가서 저녁에 민가사랑방에서
자고 일어나보니 워카가 없어저서 난감했던기억이나고, 다행이 연대군수과장이 새워카를 하나줘서 무사히 훈련마쳤던기억이나네. 아마 동네 꼬마가 필요했던모양? 그후로 그 군수과장에게 많은 물품으로 보상해줬던기억이남.
이리 폭발사고 복구로 우리공병은 무수한 잉여자재 확보해놓고 있어서 물자관리에 인심을 쓸수있었지.......
두현이를 포함한 우리동기들 모두 맡은바 임무 충실했다 생각함, 한사람 오 모 공병동기만빼고?..........
공병 중대 훈련인 FTT도 못받고
그래도 일과 후 여가 작업에는 엄청 열심히 하였다고 자부함
그 시절만 해도 군화 딱~ 신고 댕기면 폼나는 중.고생이 동네에서는 짱~이었지!
두현이가 아애 소설을 썻구만
산행후기 보다 전기에 가깝네 그려
옛날의 추억을 30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렇게 사실적으로 묘사하다니....
정말 기억략이 대단하네 그려
조금은 힘들었지만 정말 기억에 남는 산행 이었어
오늘의 이 산행 후기와 더불어 오래동안 기억에 남을 것 같네
늘 고마워
친구야!!!!
본격적인 겨울이 시작되지요, 건강하시고 금년 사업 잘 마무리 하시고 내년 사업 구상 잘 하시기를 ~~~
여기에 또 들렸네.......오인식이는 전역 후 지금 경남 창원에서 예비군 여단장(전국에 예비군 여단은 2개 부대만 있다고 함)으로 근무 중임. 참고로 본인의 임관당시 병과는 공병이었으며 1977년 3월5일 김해 육군공병학교에 입교하여 16주 동안 OBC#139기 교육을 1977년6월18일 수료하였고 6월19일 당시 조치원에 있었던 육군항공학교에 입교하여 1977년 12월24일 고정익 조종 79기를 졸업하였슴.....당시 중대장은 예병주 대위님...구대장은 13기 국중선 중위님......공병학교 생활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지금 대한항공에 기장으로 있는 동기는 광운대 이정택, 전남대 최형경임. 육군항공에서 ROTC 15기가 처음 태이프를 끊은 후 많은 후배들이 항공병과로 들어 온 것으로 들었슴. 물론 우리보다 선배들이 한두명씩 항공병과에 들어왔지만 ROTC가 주축이 된 것은 15기가 처음임. 5기인 장배현 선배는 투스타로 항공작전사령관까지 하셨고.....장선배는 우리가 항공학교에서 교육 받을 때 소령이셨는데 일부러 조치원까지 오셔서 우리들을 만나고 격려를 하셨슴......어쨋든 우리 ROTC가 육군항공 발전에 지대한 공로를 한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임. 장명환에 대한 기억은 당시 졸업을 앞두고 들뜬 기분에 몇명이 같이 1977년12월24일 항공학교 졸업식 전날 밤에 청주 토박이 장명환의 안내로 청주에 나가서 1차,2차까지 술을 먹고 늦게 부대에 들어가니 부대에서는 탈영했다고 난리가 났었고.....밤새도록 학생대대장으로 부터 기합을 받은 기억이 나고.......그때 처음 대대장으로 부터 "갓댐"이라는 말을 들었슴......당시 처음 들은 영어라서 무슨 소린지 몰랐슴. 이후 1980년 본인이 원주에 있는 77고정익항공기정비근무대 ( 1군지사 소속, 1군과 3군 예하 모든 고정익 항공기를 정비지원하는 임무를 가진 부대임, 정비된 모든 항공기의 입출고는 본인의 싸인이 없으면 입출고가 안됨. 원래 소령진급에서 몇번 밀린 고참 대위들이 진급하려고 오는 자리인데.....본인이우연찮게 등 떠밀려서 그자리에 갔슴...장배현 선배님이 본인이 전입 가기전 부대장을 마쳤슴 ) 에서 선임장교 겸 시험비행조종사로 근무할 때 장명환이가 8사단에서 비행임무 중 항공기 추락으로 사고를 당했다는 보고를 받고 정비장교와 같이 이동에 있는 사고현장으로 조사를 나갔고 원인을 분석하여 사고보고서를 작성하였슴. 그래서 당시 사고 현장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슴. 전역 후 몇년간은 현충일이면 동기들이 국립묘지에 다니고 했는데.......세월이 흘러 모두들 바쁘게 사니 이젠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슴. 그러나 이제 동기들도 한둘 바쁜생활을 접으면 다시 국립묘지에 있는 장명환에게 갈 기회가 있을 것임.
양구 파견가 있을때 함께지낸
항공장교 민병우는
지금 어디에 있는지???
민병우는 중령 예편 후 교육사 시평단에서 군무원으로 근무하다가 금년 10월에 퇴직하였슴. 지금 대전에서 살고 있슴.
장명환 동기가 8사단에서 사고 당한 거였군. 근무하던 16연대3대대가 육군항공 부대와의 거리가 불과 3~4km 밖에 안되어서 동기가 사고를 당했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누구일까 궁금했었는데 ... 영면을 빕니다.
왜 나한테는 항공장교 지원하라는 얘기가 없었지
내가 못들었나
15 기 항공병과 모임이 곧 있겠네 그전에 울산군단장 한테 먼저 가보렴
군단장이 이번에 리스로 전용기 한대 구입 했다고 들었는데
오자진 동기 반갑소. 나는 2구대 3내무반이었슴. H형 막사 제일 앞쪽 건물....... 내 오른쪽에 서울대 김종헌이가 왼쪽에는 고려대 전우민이 16주 동안 잠을 같이 잤슴. 그사람들 기억할 지 모르겠네.......
김종헌이는 현대건설 해외사업부 임원으로 근무중
전우민 공병 서울시 중랑구 묵동 81통 3반 02-979-7239 삼육대학교 교수 02-3399-3600 011-9924-7239 junwm@syu.ac.kr
동기회 전우민 귀하 131-847 서울 중랑구 묵1동 81-3 서울대 김종헌 77-01158 공병 고양시 덕양구 행신동 햇빛마을 일산A) 2414-1404 031-973-1466 현대건설 부장(홍콩파견근무) 02-746-8124 011-9631-7884
동기회 김종헌 귀하 138-854 서울 송파구 송파2동 171번지 성지아파트 101동 707호
야가 김종헌이지??? 왼쪽은 역시 같은 공병이었던 본인이고...오른쪽이 김종헌...
본지가 몇십년이 되었지만 김종헌이 얼굴이 맞네..........옆에 이계인 동기도 언뜻 본듯한 얼굴이고.....
어쨋꺼나 군단장한테 신고 안하끼가 ????
무전으로 통화는 했다만 이나이에 한달에 한번쯤 옛 추억을 꼽씹어가며 모이는게 인생에 얼마나 값진 시간을 갖는것인지 아직도 모르는구나 ㅉㅉㅉㅉㅉ
공병학교, 항공학교 추억들이 저렇케 고스란히 간직되어 있는데 다음달엔 참모회의에 참석하여 배운데로 신고하고 추억 보따리를 마음껏 풀어혜쳐 보지않을래 ~~~~~~~ 매달 15일 19시 문무대 입소다 !!
글 제목과 내용인 광덕산 추억은 어디가고 동기들 소식찾기 창이 돼 버렸네...암튼 어디이든 소식 전하면 좋른 거지 뭐!!!!
수원 동기의 옛이야기 새롭다 보니 이산동기 찾을 수 있는 장이 되었다오.
어느 장이든 동기들을 만날 수 있는 실마리가 제공되어 남은 여생을 서로 보듬고 즐겁고 행복하게 해로 할 수 있으면 족할것이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