뽕짝을 좀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 한국과 일본의 음악 관계를 역사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역사적 사실의 토대는 일본근대음악과 엔카와 뽕짝의 관계를 이해할 수 있는 결정적인 요소이기도 하다. (‘일본을 알아야 한다’ 이일영 글, ‘한겨레음악대사전’ 송방송 저 참조). 고대에서 근대까지의 일본음악은 우리나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음악적 교류가 어떻게 이루어 졌는지 역사를 찾아 삼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 본다.
고대 일본은 문화적 빈국으로 우리나라로부터 다양한 문화를 받아들였다. 8세기 일본 나라시대(奈良時代) 때의 역사서인 ‘일본서기(日本書記)’에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전해진다.
서기 453년 일본의 19대 인교 천황(允恭天皇)의 장례식에 신라 제19대 눌지왕(訥祗王, ?~458)이 악공 80여 명과 여러 악기를 보냈다는 기록이다. 그러나 일본 역사서 ‘일본서기’는 이를 바쳤다고 왜곡하고 있다. 554년에는 일본 궁중에 백제 음악인이 와 있었는데 이 사람들과 교체하기 위하여 백제 성왕(523~554) 시대 팔품의 관직을 가진 삼근(三斤)이라는 음악인을 파견하여 일본으로 건너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554년 이전에 이미 백제의 여러 음악인이 일본 궁중에서 음악을 담당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기록이다. 당시 일본에는 궁중 연희를 치를 만한 음악인과 악기가 없었음을 의미한다. 이후 백제 무왕(600~640) 시대에는 예인(藝人) 미마지(味摩之)가 612년에 기악무(伎樂舞)를 일본에 전했고, 이는 일본의 전통 가면극 기가쿠(伎樂)의 형성에 기여했다. 미마지는 일본 사쿠라이 마을에서 소년들을 모아 기가쿠를 가르쳤다는 내용도 전해지고 있다.
우리나라 고구려 음악이 일본에 전해진 기록은 684년 제40대 천황(天武天皇?~686) 때이다. 기록에는 고구려 음악 고마가쿠(高麗樂)가 전해졌다고 하는데, 고마가쿠는 일본의 궁중음악 가가쿠(雅樂) 중 신소우도쿠(進走禿:가면춤의 일종) 가 되었다고 한다. 당시 고구려와 백제는 같은 악기를 사용하였지만, 일본에 서로 다른 음악으로 전해졌다는 사실에서 고구려와 백제의 음악은 서로 다른 독자적인 음악 체계를 가지고 있었음을 확인하게 된다.
그러나 황당하게도 일본은 임나일본부설을 통해 우리나라의 문화를 받아들인 사실을 부인하며 역사 왜곡을 일삼고 있다. 임나일본부설이란 4세기 중엽에 한반도의 가야 지역을 군사적으로 정벌해 임나일본부라는 통치기관을 설치하고 6세기 중엽까지 한반도 남부를 경영했다는 학설이다. 현재는 학설로서의 생명력을 거의 잃었지만 고구려, 백제, 신라의 음악을 전해 받은 일본은 현재까지도 임나일본부설을 교과서에 실어 교육을 하고 있다.
일본에는 중국의 수나라(581~630)와 당나라(618~907)의 음악 도가쿠(唐樂)도 전해졌다. ‘일본서기’의 기록을 보면 우리나라 고구려 음악 고마가쿠(高麗樂)가 도가쿠보다 먼저 일본에 전해졌음을 확실히 밝히고 있다.
고마가쿠는 848년 일본의 왕립음악기관인 가가쿠료(雅樂寮)의 악제개혁(樂制改革) 때 백제음악 구다라가쿠와 신라음악 시라기가쿠를 통폐합시켜 가가쿠료의 오른쪽 우방(右坊)에 배치했다. 좌방(左坊)에는 당나라 음악 도가쿠(唐樂)를 배치했고, 고구려 음악 고마가쿠는 당나라 음악 도가쿠와 함께 일본 가가쿠(雅樂)의 양대산맥으로 현재까지 전승되고 있다.
일본은 고구려 음악 고마가쿠의 바탕으로 전통춤과 전통가요도 형성된다. 무용과 노래가 함께 어우러진 음악 쿠니부리노 우타마이(国風歌舞)와 일본의 가요 우타이모노(謡物)가 있다. 일본의 전통 궁중음악 가가쿠(雅樂)의 도가쿠(唐樂)와 고마가쿠(高麗樂)는 관현악 중심의 실내음악이다. 무용 음악은 부가쿠(舞楽), 기악 합주의 독립된 음악은 칸겐(管弦)이라 부른다. 그밖에 다양한 종류의 민간 속악(俗樂)을 호가쿠(邦樂)로 분류하는데, 시간이 지나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