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진(철학박사, 동국대학교 한국음악과 명예교수)
한국은 일본과 음악적으로 교류하기 이전인, 1870년경부터 교회를 중심으로 서양음악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1901년부터 1916년까지는 독일인 프란츠 에케르트(1852~1916)가 우리나라로 건너와 이왕직군악대장으로 복무하며 양악을 가르치기도 했다. 1800년대 후반에 설립된 ‘배재학당’과 ‘이화학당’, 1911년에 재발족 된 ‘조선정악전습소’에서는 음악학교들이 설립되어 서양식의 성악과 기악을 가르쳤다. 이 시기에 ‘시카고 음악학교’ 등 미국이나 유럽으로 유학을 다녀오는 이들도 있었기 때문에 창작가요를 작곡할 소양과 외국음악에 대한 정보를 충분히 갖춘 시기라고도 볼 수 있다.
이러한 바탕으로 1932년에는 전수린을 기폭제로 한국 작곡가의 절정시대가 개막된다. 1926년부터 1936년 사이에 데뷔한 작곡가들을 살펴보자.
휘문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바이올리니스트 문호월은 <노들강변> 이난영의 <봄맞이> 남인수의 <천리타향>을 남겼고, 일본 음악학교를 졸업한 손목인은 고복수의 <타향살이>, <목포의 눈물> 등 주옥같은 선율을 남겼다. 한국 최고의 작곡가 ‘박시춘’도 이 시기에 데뷔했는데 <애수의 소야곡>, <이별의 부산정거장>, <신라의 달밤>, <삼다도 소식>, 등 수많은 히트곡을 남겼다. 한국의 슈베르트라고 불리는 이재호는 일본의 고등음악학교를 졸업하고 20세에 오케레코드에 전속되어 <나그네 설움>, <번지 없는 주막> 등 불후의 명작을 쏟아낸다.
홍난파도 이 시기에 데뷔하는데 안옥경의 <여인의 호소> 이규남의 <유랑의 나그네> 등을 발표했다. 특히 가곡 분야에 두각을 보여 <성불사의 밤>, <봉선화> 등의 주옥같은 음악을 남겼다. (이호섭 글 참조) 위에 언급된 곡들은 거의 100년 동안 우리 국민 속에서 애환과 희비를 담아 불려온 명곡이라 할 수 있겠다.
명곡의 사전적 의미는 매우 잘 만들어진 이름난 악곡을 말하는데, 이 시절 트로트 음악은 100년 동안 불려지고 연주되는 소위 명곡에 해당하는 음악이다. 유행에 관계없이 대중이 늘 즐겨 듣거나 부르는 노래와 악곡으로서 ‘대중명곡’인 것이다. 이러한 곡들은 우리말을 빼앗기고, 전통문화가 말살된 마음의 상처에 아픔을 도려내고 새살이 돋게 하듯이 작곡 되어졌다. 비록 서양음악의 낯선 틀 속에서 작곡 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 위에 전통음악인 민요와 판소리의 요소를 담아 대중음악으로 만들어지게 된 것이다. 서양음악의 틀에 숨결을 불어넣어 우리만의 독특하고 새로운 대중음악인 트로트를 탄생시킨 것이다.
서양음악의 음 구성을 보통 7음 음계, 5음 음계, 3음 음계라고 한다. 우리 전통음계도 7음 음계, 5음 음계, 3음 음계 등으로 구성되어 작곡을 할 때 활용되고 있다. 한국의 대중음악인 트로트를 작곡할 때 7음 음계와 5음 음계가 활용되고 있는데, 일본의 엔카도 이와 같은 음계를 활용하고 있다. 슬픈 음악일 때 미, 파, 시, 도가 쓰이는 것은 일본의 엔카나 한국의 트로트, 그리고 서양음악도 똑같다. 한국은 슬픈 음악에서 일본의 엔카보다 미, 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