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석 대령 회고‘대북공작 비밀은 무덤까지’6.25 HID의 비화들
김동석 대령회고, 적 전차대장 귀순‘얼굴없는 국가유공자’우국충정 영원
<▼한국 육군첩보대대(HID) 김동석(金東石) 대령, 오른쪽사진은HID의 훈련중 모습>
1950년 6월 28일 새벽, 인민군 탱크가 미아리 고개를 돌파하고 중앙청을 향해 파죽지세로 밀고 올 때 주요 전투 지휘관이 6.25를 까맣게 모르고 댄스파티 꿈속에 잠자고 있는 시각, 대한민국 수도는 이미 적 치하로 들어간 꼴이 6.25의 실상이었다.
승승장구 적 전차대대장의 극적귀순
미국이 한국전 영웅으로 꼽는 한국 육군첩보대대(HID) 김동석(金東石) 대령의 회고록에 따르면 그날 중앙청 꼭대기에 인민기를 게양한 인민군 전차대대장은 김영(金榮) 소좌이다. 그는 얼마 뒤 국군에 귀순하여 6.25가 끝날 대까지 대북 공작원으로 수많은 전과를 올리는 대한민국의 국가 유공자가 된다. 김영 소좌(뒤에 김홍으로 개명)는 한국전에 최초로 참전한 미 24사단 스미스 대대를 오산 부근에서 만나 단숨에 격파시킨 인민군의 선봉부대로 기고만장했었다. 그뒤 계속하여 대전을 함락시키고 남진하던 1950년 7월 21일, 충북 영동군 구운리에 이르렀을 때 김영 소좌는 귀순을 결심한다.
탱크는 전선에 투입해 놓은 채 무전 소대원 30명을 이끌고 1사단 15연대에 투항했다. 그는 무전기를 통해 일본방송을 청취하여 민주주의 세계를 알고는 자유에 대한 동경으로 심경의 변화를 가져왔다고 한다.
이보다 앞서 김영은 영어를 아는 부하를 시켜 귀순의사를 밝힌 영문편지를 어느 촌로를 시켜 미군부대에 전달했지만 미 24사단장 딘 소장이 포로로 잡히는 바람에 실패했다. 그러다가 국군 1사단 15연대 정보장교에게 편지가 발각되어 김영이 머물고 있는 위치가 노출되고 전원이 체포되어 인생의 항로를 180도 전향하게 된 것이다. 인민군 무전요원들은 즉시 포로수용소로 보내고 김영 소좌는 사단에서 1개월간의 사상전향 교육을 받고 HID에 군속 신분으로 배치됐다.
김영은 귀순 후 지프편에 서울 모지역으로 끌려가서 보니 장택상 전총리의 별장이더라고 했다. 그곳에서 젊고 패기만만한 사나이를 만난 것이 바로 김동석 HID 36지구대장이었다. 이때 김 단장이 마패와 같이 생긴‘HID 특수메달’을 건네주면서‘대한민국 어디로 가거나 무사통과 메달’이라면서 “다시 북으로 가도 좋다”고 하더라고 증언했다. 김영은 놀라고 감동할 수밖에 없었다.
이로부터 김영은 대북공작 소대장으로 강화도, 연평도, 백령도, 대청도, 소청도 등 서해 도시일대에 그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으며 특히 황해도 일대에는 침투 체류하면서 007작전으로 수많은 신화와 같은 전공을 세울수 있었다. 최근 천안함 침몰로 대한민국이 피격당한 눈물의 바다가 바로 6.25때 김영이 종횡무진 누비던 해역이다.
<▲강원도 고성군 명파리에 건립된 36지구대 위령비와 공동묘지를 옛 부하들과 참배한 김동석 대령(오른쪽 첫번째)>
팔순넘어 불교신도로 노후의 삶
김영은 일제하에 일본 삿포로 제국대학 농학과에 재학하다가 8.15후 평양에서 인민군에 입대했다. 그는 대위때 소련 스탈린그라드 기갑학교에서 1년간 위탁교육을 받고 귀국하여 인민군 전차사단 창설에 참가한 엘리트 요원이었다. 이 같은 김영이 승승장구하던 전선에서 국군에 귀순하여 팔자를 고친 것은 너무나 극적인 인생반전이었다. HID 공작요원으로 그가 5년여동안 육군첩보부대에서 활약한 실상은 휴전이후 지금껏 소상히 털어 놓을 없는 비화로 간직되어 있는‘미공개 국가유공자’인 것이다.
김영은 HID 역할이 끝난후 삿포로 제국대 동창들의 주선으로 부산에 있는 모 기업체 감독관으로 입사했다가 이듬해에는 대기업 영업부장으로 발탁되어 결혼도 하고 생활이 정착되었다. 또한 원양어선 10여척을 보유한 남중산업 대표직을 맡아 뛰어난 경영실적을 보인 후 은퇴하여 불교신앙에 따라 도선사의 신도회장을 맡기도 했다. 김동석 대장의 회고록(2005.10)속에는 팔순이 넘은 나이로 아직도 우이동에서 음식점을 경영한다고 적혀있다.
그러나 5공 정부때는 부동산관련 중상모략으로 삼청교육대에 끌려가 두달간 고생하여 일생의 막바지에 또 하나의 파란만장의 회한을 겪었노라고 한다.
원산만 동굴 기뢰기지 탐색 격파
김동석 대장이 동해안 지구대로 전보됐을 때는 미 해병대 1개 중대가 주둔하고 있던 원산만 앞 바다에서 부유 기뢰에 의한 미군 함정 피해가 속출했다. 인민군은 암벽 동굴 속에 소련제 부유기뢰를 저장해 놓고 조류에 따라 이를 흘려보내 미 해군 대형함정 13척이 침몰했다.
적 해안포에 의해 침몰한 소형 주정들도 80여척에 달했고 미국 병원선 베네발렌스호도 이 무렵 소련 잠수함 공격으로 침몰했다. HID는 난공불락의 원산만 앞 돌출 호도반도 남단에 위치하여 암반동굴을 탐색했다. HID 36지구대 예하 출동팀이 은밀 침투로 수로를 개척하고 위치를 파악한 후 현지 세포망을 조직하는데 성공했다. 곧이어 미국 미주리호 함포에 의해 동굴이 전파됐음은 물론이다.
미군은 인천상륙작전 성공후 1950년 10월 중순 원산상륙작전을 감행했지만 원산만의 기뢰 때문에 보름동안이나 발이 묶여 있었다. 이때 미군의 요청으로 일본해군 전문가들이 기뢰 제거작업을 맡았으니 사실상 일본해군도 6.25 참전군에 속한다고 믿어진다.
북의 동굴 기뢰진지를 제압하고 나니 지하기지에 설치된 대공포화가 미군 함재기들의 근접지원을 어렵게 위협하는 것이 문제였다. 이 때문에 김동석 부대는 동해안에 위치한 인민군 총사령부 직할 54고사포 부대 위치 파악이 중요임무였다.
인민군 고사포 대대장 김대영 귀순
김동석 부대 제2대인 K선 공작조가 뛰어 적 고사포대대 김대영 대대장이 긴급작전회의 참석차 육로로 이동하는 시각을 알아냈다. 공작조가 예정시각 도로변에 잠복하고 있다가 차량을 습격, 김대영 대대장을 생포, 귀순시켰다. 김대영의 정보로 북한 전역의 대공포 일람표를 파악하여 미 제5공군과 7함대의 함포로 결정타를 먹여 제공권을 확보할 수 있었다.
김대영이 귀순하기 이전 인민군 고사포 대대는 3개월간 파주에 주둔하고 있었다. 인민군 총사령부는 8월 15일까지 남한을 해방시켜 서울을 수도로 삼기위해 대공방어를 그에게 맡겼다. 포천에 주둔한 김대영 고사포대대 인근 마을 소년이 자주 부대 정문에 접근하여 호기심을 보이자 초병이 잡아다 문초했지만 16세의 어린 학생이라 돌려보냈다. 어느 날 김대영 대대장이 이 소년을 보고 소년병으로 자원입대 시켰다. 당시 소년의 부친은 금은방을 운영하다 피난을 못가 숨어 지내다가 몰래 보관하고 있던 금을 대대장에게 넘겨주며 아들의 신변보호를 부탁했다.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으로 고사포 대대장은 북쪽으로 후퇴했다가 1.4후퇴 직후에 동해안으로 이동하여“연락병으로 데리고 있는 아들이 잘 있으니 안심하라”는 편지를 보내왔다. 그러다가 1952년 10월, 김동석의 36지구대가 고사포 대대장 김대영과 그의 연락병 K군을 통천에서 생포, 귀순시키므로써 인생역전 드라마가 공개된 것이다.
김대영은 인천상륙작전 성공이후 패잔병 처지로 북으로 도주하면서도 K군의 아버지가 가져다 준 금괴를 이용하여 식량을 조달하고 중공군과의 암거래로 고위층의 신임을 얻어냈으며 전향시까지 같은 직위에서 장기 복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때 김대영은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묘미가 전장에서도 작동한다는 사실을 체험하고 신기하게 여겼다.
석방 후 파주 K군 집 기거하다 의문사
김대영은 36지구대에서 심문을 통해 전향의사를 밝히고 동해안의 첩보작전에 필요한 중요정보를 많이 제공했다. 그러나 한달뒤 김대영은 거제 포로수용소로 넘어갔다가 휴전직전 이승만 대통령의 반공포로 석방 때 풀려나 대한민국 자유시민이 됐다. 석방 후 김대영은 파주의 K군 집에 기거하면서 생계수단이 막막하여 김동석 부대에서 나오는 음식물 찌꺼기로 돼지를 키우다가 5.16후에는 삼척군수로 취임한 김동석 대장을 통해 HID 부대원이 소유한 충남 금산의 야산을 개간하여 농사를 짓기도 했다.
그 뒤 1970년초 신문에 그가 의문사 했다는 보도가 있었지만 진상을 아는 이는 없다고 한다. 그리고 김대영의 연락병이던 포천의 K군은 60대 후반의 노인이 되어 살고 있지만 아무도 이들의 과거사와 6.25 비사를 정확히 밝혀내려 노력하지 않고 있으니 삶과 죽음의 문턱을 오갔던 그들의 인생드라마도 묻혀지고 말았다는 이야기다.
인민군 사단장 이영희 공작 귀순
6.25 초전 때 미 24사단장 딘 소장이 적의 포로로 잡혀가고 한국군 참모총장을 지낸 채병덕 장군은 초전의 실패를 만회코자 하동지역 전투에 참전했다가 허무하게 전사했다. 또한 미 8군 사령관 워커 중장은 중부전선 시찰 도중 교통사고로 전사하고 거제도 포로수용소장 도트 준장은 친공포로들의 생떼에 걸려 납치됐거나 1주일 만에 겨우 풀려난 웃지 못할 수모를 당했다. 이같은 고위장성들의 희생과는 달리 휴전 직후인 1954년 2월 9일, 김동석의 36지구대에서 인민군 사단장 이영희를 생포하는데 성공했으니 획기적인 전과였다. 그러나 이 사건은 휴전협정 분위기와 한미관계의 미묘한 상황 때문에 공식적인 발표가 없이 공작대원들의 비화로만 전해왔다.
김동석 대령 회고록은 당시 공작 참가자 가운데 생존자인 한영원, 전동하, 고현준 씨의 증언을 통해 ‘비망록마저 공개금지’ 된 이 사건의 대강을 전해주고 있다. HID 36지구대는 휴전직전까지 강원도 고성 제1지대, 원산만 능도와 여도에 제2지대, 명천 앞바다 양도에 제 3지대를 운영하며 매월 2~3회씩 침투공작을 벌였다. 그러다가 휴전이 되자 모두 본대로 집결하여 설악산 일대에서 활동하면서 적 사단장 이영희 생포작전을 벌였던 것이다.
이영희 송환요청에‘그는 포로 아닌 귀순자’
이 무렵 김동석 대장이 공작팀 K선을 움직여 적 사단장 이영희를 체포하려했지만 휴전협정으로 적 해상침투에는 미군의 지원을 받을 수 없었다. 그래서 적 해상 침투를 위한 공작선 쉐도우(Shadow)호를 자체 설계, 제작했다. 설악산에서 벌채한 노송을 바닷물에 장기간 불린 다음 군용천막 천을 두 겹으로 입힌 몸체에 쌍발 엔진을 장착했다. 여기에 구경 50미리 중기관총을 설치하여 시속 30노트로 침투, 이영희를 감쪽같이 생포, 귀환했다.
당시 공작대는 김진수 대위 지휘로 김태영, 박동항, 한영원, 이영하, 이영식, 고현준, 신석호, 유한경, 신유덕 등 9명으로 구성됐다. 이 첩보작전 성공으로 김동석 대장은 동해로 진입한 미주리호로 초청되어 그곳에서 헬기편으로 용산 미군사령부로 날아가 격려를 받았다. 이때의 공로로 김동석 소령은 을지무공 훈장을 받고 중령으로 승진했다. 그뒤 판문점에서 열린 정권위원회에서 북측대표 이상조와 남일이 백선엽 장군에게“휴전 뒤에 납치해 간 이영희를 송환하라”고 엄중 항의했다.
그러나 “그는 포로가 아닌 귀순자로서 잘 보호 받고 있으며 본인도 북으로 돌아갈 의사가 없다”고 답변했다. 김동석 대장의 회고록은“첩보 공작원의 작전 비밀은 무덤까지 갖고 간다”는 원칙으로 자세한 내막은 책에도 소개하지 않았다. 김동석 회고록은 가장 충성스러운 부하 공작원으로 신유덕(04.4사망)과 신유길(05.1사망) 형제를 꼽았다. 신씨 형제의 이야기는 2004년 8월 대한뉴스‘살아있는 전쟁영웅 김동석 HID 대장’편에 일부 소개되어 있다. 신씨 형제는 제주도 출신으로 일본 오사카에 살다가 8.15후 함북 원산으로 이주했다가 부산에 정착하여 6.25 이듬해에 첩보부대 공작원이 됐다. 이들 형제는 수영과 잠수실력이 뛰어나 36지구대의 대북 해상침투 작전에는 빠짐없이 출전했다. 적 사단장 이영희를 생포한‘쉐도우 작전’시는 선장으로 목표지역 해역까지 정확히 인도했다. 신유덕 씨는 적 해안선에서 총탄이 날아오면 장시간 물속에 잠수하여 동료들을 구출하는 역할을 수행했으며 54 고사포 대대장 귀순 작전에도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미국정부 선정‘전쟁영웅’김동석
HID 대장 김동석은 1923년 러시아 연해주에서 태어나(87세) 하얼빈 대도관 고등학교 졸업 후 하얼빈 무도 전수학원 재학 중에 만주 유도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한 강골이다. 이어 황포군관학교 단기 과정을 거쳐 하얼빈 주둔 장개석 군 임시소령으로 활동하다가 귀국하여 육군사관학교 8기생으로 소위로 임관됐다. 6.25때는 중대장으로 참전했다가 HID 파견대장으로 첩보전을 주도했다. 이때의 전공이 높이 평가되어 미국정부가 2000년 12월 6.25 전쟁영웅으로 선정했으며 2002년 5월에는 미육군 보병 2사단 전쟁박물관에‘김동석 영웅실’을 설치하고 매년 12월 16일을‘김동석의 날’로 지정, 기념하고 있다. 김동석 대장의 막내 딸 가수 진미령(본명 김미령)은 미국 보병 2사단 전쟁 박물관에서 거행된 아버지 흉상 제막식에 초청되어 자랑스러운 감회를 잊을 수 없다고 회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