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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군대생활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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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15 사단 의무근무대 

 

1977년 6월, 대구의 군의학교에서 4개월 간의 의정병과 전문교육을 수료하고 자대에 배치되었다. 하루 전날밤, 각각 어느 부대로 배치되었다는 소문이 퍼졌고 전방에 배치된다는 소식을 들은 동기들 중 몇몇은 부랴부랴 서울의 집으로 전화를 하더니 다음날 마지막 최종 발표시 소문과 달리 부대 배치가 바뀌기도 하였다. 나는 어딘지도 모르는 최전방 15사단에 배치를 명 받았다. 그래서 대구에서 서울로, 춘천으로, 화천으로 그리고 다시 군용 트럭을 타고 붉은색 먼지가 휘날리는 비포장 도로를 한참 달려서 최전방의 승리부대 15사단에 도착하였다.

 

그 당시 15사단은 남한에서 제일 중요한 최전방 화천의 봉오리, 다목리에 위치한 사단이라 15기 중에서도 각 병과별로 최정예 ROTC  장교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즉, 십미터 앞의 돌멩이 위에 콜라깡통을 올려 놓고 그 깡통만 정확히 맞추는 식으로 권총 사격을 정말 잘 하였고 유격이 너무 재미있어 다른 친구들 대신 유격훈련을 가주겠다고 자원하던 군번 2번의 중앙대 약대 출신 의정장교 이만형, 수의장교는 모두 ROTC 출신 뿐이어서 장기지원을 하여 군대에 계속 남아있으면 나중에 수의감이 될 것이라고 말하던 어깨가 떡 벌어지고 덩치 좋던 8번 전남대 출신 수의 장교 모의원 등, 병정놀이가 재미있고 즐거워 군대생활이 정말 기대가 된다는 대단한 친구들이 모두 함께 모여 있었다.

 

나는 598번, 군번도 한참 느린데 어쩌다 줄을 잘 서서 이들과 함께 최전방에 떨어졌는지 궁금해하고 있었는데 엎친데 덮친격이라 할까 내가 사단 본부 의무대대에서 최전방 대대의 의무지대로 차출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그 이유는 100 여명의 우리 초임장교들은 전방에 도착하자마자 모두 1주일간 집체교육을 받는데 사격을 비롯한 보,포,기,공,통의 모든 병과에 관한 복습 교육 결과, 엄마, 내가 1등이 된 것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이것은 불가사의한 일인데 어째서 군번 2번, 8번의 내노라하는 진짜 군인들을 물리치고 나같은 엉터리 군인이 그리된 것인지!

 

1주 교육 종료 후 방덕재 사단장이 표창장을 주며 고개를 갸웃 하고는, “아니 어째 보포기공통 다 제치고 의무병과가 1등이냐” 하시던 말씀이 기억난다. 각설하고, 군대에서 1등하면 3년간 재수 없단 말이 꼭 맞아서 그 후 두 달도 안되어 나는 갑자기 최전방으로 발령이 난다. 50연대 3대대 군의관이 허리가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국군 대구 통합병원으로 후송을 가버려서 의무 지대장 자리가 비었는데 당시 의무참모 모모 중령은 내가 사단 초임장교 교육에서 1등을 하였다는 이유로 이만형 소위 등 출중한 군인들을 놓아두고 나를 전방으로 보낸다는 것이다. 

 

그는 나쁜 사람은 아니었으나 군의관이 아니고 의정 장교이어서 그런지 사단장이나 참모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매우 애를 썼다.. 예를 들면 사단장이 “요즘, 눈이 좀 침침한 것 같아” 라고 하면, 집안이 좀 유복한 군의관에게 휴가를 보내어 독일제 안경 마비츠나 로덴스탁 같은 당시 최고급 브랜드의 선글라스와 금테 안경을 사오게하여 사단장에게 가져다 드리는 스타일이었다.

 

그 당시 그 곳에는 14기 중위 선배들과  X-ray  방사선 기사인 기술행정사관 출신의 유소위 등이 있었던 것 같다.  X-ray 는 현상할 때 많은 은이 배출되어 방사선 사진을 찍는 것 보다 그 은의 회수와 재고를 관리하는 것이 더 큰 일이라는,  얌전하던 유소위의 이야기를 듣고 그게 무슨 소리인가 하고 의아해 하던 일이 생각이 난다.

 

그때에는 신참 소위들이 오면, 군기를 잡는다고 야간 점호를 빡세게 한다는 소문이 돌았고 실제로 모의원 같은 동기는 사실 사병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군기가 쎈 소위 중의 소위였다.. 그래서 그랬는지 그 때에 사단 의무본부대에 나의 대학 1년 선배인 장돈용 상병이 의무병으로 복무하고 있었는데 그는 어느날, 개인적으로 은밀히 나를 만나자고 하더니 한참 말을 돌리다 군기를 잡지 말고 점호를 살살해달라는 취지의 말을 했다. 아마 선임 병사들의 부탁으로 그렇게 하게된 모양이었으나, 나야 물론 나 자신부터가 군기가 빠진 어리숙한 장교였으니 그렇게 부탁할 필요도 없었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세상 일은 앞을 알 수가 없으니 장선배는 내가 제대하고 종근당 개발부에 취직하고 보니 그 곳에서 이미 주임으로 일하고 있어 나중에 회사에서는 나를 가르치는 선배 사수가 되었다. 그와는 이런 저런 인연으로 회사를 다니던 총각 시절에 여름에 휴가도 같이 가고 하면서 가깝게 지냈는데 수십년이 지난 후 그가 한국의 유수한 어느 제약회사의 상무가 되어 토론토에서 출장을 왔다가 다시 반갑게 만난 일이 있다.

 

또한 나중에 알고보니, 토론토에서 만난 15기 친구 중에 고려대 출신 포병 민세기군도 그 당시 나와 함께 15사단 에서 함께 근무하였다고...


6. 15기 전방 철책 소대장 동기의 자살

 

이 때에 한 가지 잊지못할 일은 최전방 철책선에서 근무하던 동기 한명이 부임한지 한달만에 자살한 안타까운 사건이다. 그는 GOP (General Out Post) 전방 경계 초소의 소대장 이었는데 사랑하던 애인과 헤어지게 되었으나 철책에 들어와 6개월 동안은 휴가는 물론 외출 외박을 할 수가 없다는 사실에 절망하고 우울증이 겹쳐 M 16 을 입에 대고 엄지 발가락으로 방아쇠를 당겨 자살 하였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처음에 사단 교육을 마치고 최전방 GOP 철책선에 1일 견습 소대장으로 견학을 갔었는데 낮에는 잠을 자고 초저녁에 일어나 보병 소대장 동기와 함께, 적과 대치한 북방한계선 철책을 바라보고 경계근무를 서는 초병들의 초소들을 밤새 내내 돌면서 순찰하였던 일이 생각났다. 그 때 그곳에서 느꼈던 긴장감과 고립감, 무언가 쓸쓸하고 절박한 상황 속의  무겁고 진중하던 분위기가 다시 생생하게 느껴져 숙연해지고 마음이 안좋았다.

 

그는 첫 봉급을 받아 부하들을 회식 시켜주는데 오천원인가를 쓰고 나머지 5만 몇천원은 내무반 한쪽을 막아 만든 그 만의 작은 공간에 봉투 채로 고스란히 남겨 놓았었다고 한다. 부임 한달 만에 접한 이러한 비보에 우리는 모두 안타까워 하며 충격에 휩싸여 할 말을 잃었다. 군인은 사망하면 더 이상 사람이 아니며 물품으로 분류된다는 사실에 경악하며 10종 군수품으로 돌아와 사단 본부 영안실에 안치된 그의 시신을 우리는 상부의 허락이 나지 않아 들어가 보지도 못하였다. 우리 15기 동기들은, 소식을 듣고 달려와 비통해 하시던 그의 부모님을 먼 발치에서 바라보며 먼저 간 그 친구를 생각하며 묵념을 올렸었다.

 

또 한번은 14기 선배이던 전방 수색대의 소대장이 비무장지대 안으로 수색을 나갔다가 발목 지뢰를 밟아 발목이 절단되어 새벽에 사단 의무대로 긴급 후송되어 온 일이 있었다. 아무리 모르핀을 주사해도 통증 때문에 계속 비명을 지르는 그를 후방병원으로 긴급 후송했다는데 나중에 들으니 그는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는 의병제대를 했다고 한다. 국가를 위하여 군에 왔다가 불구가 되어 제대하게된 그 분을 생각하면 정말 남의 일 같지가 않았고 마음이 아팠다.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는 살벌하고 긴장이 감도는 최전방에서 이러한 우울한 소식들을 들으며 의기소침하고 있던 때에 그나마 유일한 낙은 퇴근 후 동기들을 만나 회포를 푸는 것이었다. 젊은 우리들은 그때에 가능한 한 우울한 분위기를 빨리 떨쳐내려고 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사단보다 전방에 있던 50연대는 술집, 다방 등이 늘어서 있는 꽤 큰 삼거리인  다목리에 자리 잡고 있는 반면 사단 본부는 연대보다 후방이지만 오히려 술집 하나 없는 외진 골짜기에 자리 잡고 있어서 버스를 타고 나가지 않는 한, 사단 본부 앞에는 음식점은 커녕 아무 시설도 없었기에 우리는 기껏해야 밥을 대 먹던 사단 앞 농가에 모여 막걸리를 마시는 정도의 여유를 즐길 뿐이었다.

 

이 집에는 거의가 다 ROTC 14기와 15기인 사단 본부의 소위 중위 위관장교들이 밥을 대 먹고 있었는데 반찬은 집주인이 직접 농사 짓는 채소와 산나물 위주여서 건강에 좋은? 채식 식단으로 삼시 세끼 김치와 나물들만 올라왔다. 그러다가 월말 봉급날이 되어 밥값을 지급하는 때가 오면, 하루나 이틀 생선 토막이 추가되곤 하였다. 그래도 식욕이 왕성하던 우리는 큰 스테인레스  밥그릇에 고봉으로 올라오던 흰 쌀밥은 물론 밥상의 반찬들도 하나도 남기지 않고 모두 싹싹 비웠었다. 

 

7. 군의관과 검찰관, 그리고 헌병 소대장

 

사단 의무 근무대에서 두달 남짓 근무할 때 고등학교 3년 선배인 군의관 장동원 중위 (경기고 66회) 님을 알게되었다. 장선배님은 휴가나 출장을 하도 자주 나가서 자주 만나지는 못했지만 내가 후배라고 이것 저것 챙겨주시고 조언도 해주시곤 하셨다. 당시 미국의사시험? 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나중에 국립 서울병원장을 하신 것으로 알고 있다.

 

또한 장선배님 때문에 또 다른 고등학교 선배님이며 15사단에서 유일한 검찰관이셨던 이종기 중위님도 알게되었는데 이중위님은 법대 출신이시지만 고등학교때에도 소설로 화동문학상을 받았고 서울대 대학신문에도 소설이 당선되었던 문학적 소질도 출중한 분이셨다. 당시에 이미 결혼을하여 그 동네에서 방을 얻어 형수님과 일하는 처녀를 데리고 함께 살고 계셨고 밥도 제대로 못 먹고 고생?하는 후배가 안쓰러우셨는지 나를 자주 집으로 불러서 형수님께서 준비하신 성찬을 대접해주셨다. 선배님은 길에서 우연히 만나면 밑도 끝도 없이 " 야, 이거 너 가져라! " 하며 나는 피지도 않는 새 담배를 한 갑씩 주시는 등 나를 이뻐해 주셨는데 덕분에 나는 다른 동기들이 부러워하는 호사를 누렸다.

 

한번은 술 취한 무뢰배가 군인 가족들만 사는 사단 근처 마을 동네에 들어와 이 집 저 집에 들어가 사람들에게 행패를 부렸고 형수님께서 무서워 이중위님에게 전화를 하시는 일이 있었다. 이선배님은 집에 들어와 행패부리는 그 사람을 나가달라고 타이르다 말을 듣지 않고 계속 행패를 부리자 그를 끌어냈는데 연락을 받고 달려온 헌병 하사관이 이중위님을 보고는 그가 검찰관인지도 모르고, 문제가 생기면 헌병대에 연락해야지 육군 중위 주제에 왜 민간인 취객과 시비하느냐고 야단을 쳤는데 이선배는 곤란한 상황에서도 끝까지 자신의 신분을 밝히지 않으셨다는 일화가 있다.

 

내가 제대하고 인사차 대검찰정으로 선배를 한번 찾아간 적도 있고 또 한번은 정말로 우연히 부산 해운대에서 뵌 적이 있다. 그때 나는 제대 후 종근당 개발부에서 일하던 때였는데 앞서 말한 대학선배인 장돈용선배 등 총각들 네명이 여름 휴가 동안 지리산, 남해안을 도는 여행을 마치고 부산에서 서울로 가는 기차를 타려고 해운대 관광호텔 앞을 지나다 이검사님을 만난 것이었다. 가족과 함께 여름 휴가를 왔다는 선배님은 매우 반가워하시며 나에게 잠깐 기다리라고 하시더니 가족들을 호텔로 데려다 준 후 일부러 나를 만나러 다시 오시어 우리 일행에게 맥주를 사주셨다. 우리들 중 나를 뺀 나머지 세사람은 서울대학교 후배이긴 하지만 누군지도 잘 모르는 선배님에게 시원한 맥주를 얻어마신 것이다.

 

이선배님은 범죄자들에게는 추상같이 호통을 치는 무서운 검사로 잘 알려져 있었는데 후배들에게는 정말 정이 많으시고 자상하셨다. 나는 이렇게 후배들에게 잘 해주시는 이선배님께 늘 미안하고 고마웠다. 그 뒤 선배님께서 청와대 파견검사로 근무했다는 소식을 신문에서 보았고 나중에 변호사 개업을 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내가 캐나다로 이민오면서 소식이 끊겼다. 어쨋든 살아오면서 나는 여러 선배님들, ROTC 선배님들, 그리고 고등학교 선배님들에게 많은 은혜를 입었다.

 

사단에서의 짧았던 근무기간 중에서 또 한가지 기억나는 에피소드로는, 컨보이 (convoy,병력호송) 를 자주 다니던 15기 헌병 동기 고기영 소위가, 당시에 마침 신입사병으로 15사단에 배속이되어 왔던  우리와 동년배인 전영록이라는 인기가수를 데려다가 노래를 시켜서 우리들만을 위한 특별한 갈라 콘써트를 열었었는데 그가 위병소 앞에 앉아 기타 치며 노래 부르던 그 공연?을 함께 보았던 기억이 있다.

 

또한 27사단 소속 헌병들은 15사단 본부의 신삥 소위들이 주말에 버스를 타고 27사단이 있던 사창리에 나가 외식이라도하며 잠깐 즐기려고 하면 만만하게 보고 공연히 사소한 일에 트집을 잡거나 쯩을 보자는 둥 하면서 시비를? 걸기 일쑤 였고 나는 그런 일이 없었지만 동기들 중에 문제가 생기면 우리는 가끔,  덩치는 아담했지만 반듯하게 각이 지고 서슬이 퍼랬던 고소위의 도움을 받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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