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5.19 (일)

[국악신문] 박상진의 한류 이야기 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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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신문] 박상진의 한류 이야기 35

시인을 꿈꾸던 험난한 수학자의 여정

  • 특집부
  • 등록 2022.07.26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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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상진(철학박사, 동국대학교 한국음악과 명예교수, 한국동양예술학회 회장)


지난 회에 이어서 한국인 최초로 세계 최고의 필즈상을 수상한 허준이 교수의 이야기를 이어가겠다. 허준이 교수의 방황했던 학창시절이 주는 의미와 예술과의 연관성, 그리고 수학자의 길로 들어서게 된 과정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KBS, SBS, MBC, 연합뉴스, 뉴시스 등 보도기사 참조 및 인용)


매 4년마다 열리는 세계수학자대회(International Congress of Mathematicians (ICM))에서 수여되는 필즈상을 한국인 최초로 수상한 허준이 교수

 

허 교수는 이날 수상 소감에 대해 "제게 수학은 개인적으로는 저 자신의 편견과 한계를 이해해가는 과정이고, 좀 더 일반적으로는 인간이라는 종이 어떤 방식으로 생각하고 또 얼마나 깊게 생각할 수 있는지 궁금해 하는 일입니다"라고 하면서 "저 스스로 즐거워서 하는 일에 의미 있는 상도 받으니 깊은 감사함을 느낀다"라고 말했다.


허 교수는 자신이 "한국에서만 교육을 받아본" 국내파라고 소개하면서, "개인적으로 따뜻하고 만족스러운 유년 생활을 했다"고 회고했다. 그는 초··고교 과정과 대학 학부(서울대 물리천문학과), 대학원 석사과정(서울대 수학과)을 모두 한국에서 마친 후 박사과정을 미국에서 밟았다.


허 교수는 "·중학교 때 한 반에 4050명씩 있는 다양한 친구들과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이 좋기도 하고 싫기도 했지만, 그 때만 할 수 있었던 경험은 지금의 저를 성장시키는 자양분이 됐다"고 회상했다.


그는 고교 수학에 대해 "굉장히 재미있어 했고, 열심히 했고, 충분히 잘 했다"고 밝히면서 "(초등학교와 중학교) 학창 시절의 과목 중 하나인 수학에는 이런저런 이유로 정을 못 붙였지만 게임 퍼즐 등 논리적 사고력을 요하는 종류의 문제에는 자연스럽게 끌렸다"고 설명했다.


필즈 메달의 앞면과 뒷면.

 

그러나 허 교수는 1999년 고교시절에 한국수학교육학회에서 주관한 한국수학경시대회에 응시한 적이 있는데, 100점 만점에 58점을 받았다. 이 대회에서 상위 10%에 들어가면 본선에 진출하게 되지만 허준이 학생은 성적이 부족해서 예선에서 탈락하게 된다. 이와 같은 상황이 빚어진 이유는, 결국 국내 입시제도 하에서의 교육 방식으로는 허준이 같은 학생의 가능성을 측정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는 결국 등단 시인을 꿈꾸며 고교를 자퇴했다. 가장 좋아하는 작가로는 기형도 시인을 꼽았다. 허 교수는 "어릴 적 가장 열정이 있었던 것은 글쓰기였고 그 중 제일 좋아하는 시를 쓰는 삶을 살고 싶었다고 말하며 고교시절 방황했던 시절을 회고했다.


그렇다면, 허교수는 어떻게 수학자의 길을 걷게 되었을까?


허 교수는 고교를 자퇴한 후 검정고시를 거쳐 2002년 서울대 자연과학대에 입학하게 되지만, 대부분의 우리 젊은이들이 그렇듯이 허준이 교수도 20대 초반에 진로를 확실히 정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수학자의 길을 걷게 되는 운명적인 허준이의 삶을 맞이하게 되는데, 그 과정을 소개하겠다.


허 교수는 "어렸을 때 수학에 흥미가 있었지만 타고난 글쓰기 실력으로는 어림도 없어 무엇을 하면 현실적으로 가능하고 적당히 만족하며 살 수 있을까를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는 "과학이 재밌어 과학저널리스트를 할 수 있지 않을까 해서 (학부를) 그에 적합하다고 생각하는 물리천문학과에 진학했다""대학교 3, 4학년에 진로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면서 학업을 쉬기도 했는데, 우연한 기회에 수학 수업을 들으며 수학의 매력을 처음 느꼈다"고 말했다.


그 우연한 기회는, 서울대에서 마련한 일본인 히로나카 헤이스케(91) 하버드대 명예교수의 수학 강의를 수강한 이후 허준이 교수의 삶은 완전히 바뀌기 시작했다. 1970년 필즈상 수상자의 강의 탓인지 수학 전공자들도 거의 포기할 만큼 어려운 내용이었지만 당시 물리학 전공 학부생인 허 교수는 끝까지 들었다. 허 교수는 "비전공자로서 히로나카 교수가 제시하는 예시 몇 가지만 이해해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나중에 혹시 과학 기자가 되면 히로나카 교수를 인터뷰하겠다는 생각도 있었다고 말할 정도로 이때까지만 해도 수학자의 길은 꿈도 꾸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혼자 식사를 하는 히로나카 교수에게 말을 걸었다고 한다. 이 후 둘은 매일 점심을 같이 먹으며 대수기하학의 특이점 이론에 대해 토론했다. 허 교수는 미국 대학원 박사과정 시절 리드 추측을 풀어내는 데는 이 때 쌓은 지적 경험이 결정적이었다고 말한다. 허 교수는 "히로나카 교수는 옛 이론을 가르치지 않고 자신이 지금 연구하는 내용을 소개했다"처음으로 누군가가 실제로 수학을 연구하는 모습을 본 것이라고 말했다.


허 교수는 일본 교토의 히로나카 교수 집에 머물기도 할 만큼 두 사람은 가까워졌다. 이렇게 스승이 된 히로나카 교수의 권유로 허교수는 서울대 대학원 수학과에 진학하면서 수학을 전공하게 된다. 그리고는 후일 히로나카 교수의 추천으로 미 유학길에도 올라 박사과정을 밟게 된다.


수학 난제를 해결할 때도 히로나카 교수의 특이점 연구가 바탕이 되었다고 허 교수는 말한다. 그럴 정도로 멘토로서의 히로나카 교수의 영향력은 허 교수가 수학자의 길을 선택하는데 있어서 절대적으로 작용한 것이다.


이렇듯 허준이 교수의 인생 궤적은 독특하다. 필즈상 수상자의 대부분은 어렸을 때부터 천재성으로 두각을 나타냈다고 한다. 그러나 허 교수는 어렸을 때부터 수학 성적이 신통치 않았을 뿐만 아니라 시인이 되겠다고 하며 한 때는 방황하다가 대학원 석사 과정에서 뒤늦게 수학을 전공했기 때문이다. 수학자로서의 길로 들어서기까지 험난한 여정을 엿볼 수 있다. 반면, 예술의 세계와 수학과의 연관성에 대한 궁금증을 자아내기도 한다.


다음 회에는 허준이 교수와 우리 교육체계와 관련한 각 계의 의견을 들어보는 시간을 갖겠다.

 

 

 ※ 위 내용은 외부 필진의 칼럼으로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